김봉곤의 <여름, 스피드>를 읽고
김봉곤의 <여름, 스피드>를 읽었다. 2016년에 등단한 젊은 작가의 첫 소설집이다. 퀴어의 사랑이야기가 주된 소재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고, 제목과 책 표지가 주는 느낌, 그리고 작가의 이름으로 인하여 읽기도 전부터 왠지 부드럽고 조곤조곤하게 말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그러니까 이를테면 황순원의 <소나기>와 같은? 그러나 막상 직접 만난 책은 예상과는 사뭇 달랐다. 너무 달라서 당황스러울 정도.
일단 일반적인 소설들과는 작법 스타일부터 꽤 다르다. 보편적인 소설이 서사 중심이라면 김봉곤의 소설은 등장인물의 내면 중심이다. 물론 등장인물의 내면이 중요하지 않은 소설이 있겠냐만은, 이 소설집에 실린 모든 소설은 주인공 1인칭 시점이며, ‘나’의 머리속의 생각과 목소리가 엄청나게 상세하게 나열된다. 이렇게까지 누군가의 생각을 낱낱이 기록하고 공개하는 것이 가능하구나 싶을만큼 적나라하다.
생각(이라기보다는 의식)을 낱낱이 옮기는 글이다보니 지극히 의식의 흐름에 따르는 글쓰기 방식이기도 한데, 그런만큼 독자 입장에서는 적응하고 따라가기가 쉽지 않은 면도 있다. 어떤 문장은 마치 구글 번역기를 돌린 듯 기이한 느낌까지 준다. 예를 들어 “과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랑거리도 못 될 사소한 기쁨을, 부모님과 친구와는 공유할 수 없고 공유하기 싫은 그런 것들을 말할 수 없는 적막함. 망연하여 갈피를 잡지 못하는 그 마음을 가누어 억눌러야 했을 때, 나는 당황했다. 하지만 나는 이제 있다! 있었다.”와 같은 문장들.
물론 작가 본인은 아마도 의도적으로 이렇게 썼을 것으로 짐작된다. 자신의 글의 특징을 명확히 알고 있고 그에 대한 비판점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일면 실험하는 의미로 그렇게 썼을 수도 있고, 혹은 글은 그 자체이므로 그렇게밖에 쓸 수 없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그의 등단작인 <AUTO>는 대학원 서사창작과에 진학해서 글을 쓰며 신춘문예를 준비하는 주인공, 즉 김봉곤 본인의 자전적 이야기인데, 여기에서도 주인공은 담당교수에게 “보여주기보다 말하는, 행동하기보다 의식을 좇는” 글이라며 비판을 듣는 장면이 나온다.
내용적인 부분에서는, 같은 퀴어 소설인 박상영의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과 비교했을 때 퀴어의 감성이 훨씬 더 짙게 배어있었다. <자이툰 파스타> 역시 퀴어의 감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좀 더 보편적인 젊은이의 느낌이라면, <여름, 스피드>는 말 그대로 퀴어가 아니면 쓸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들만의 용어, 그들만의 감수성, 그들만이 알 수 있는 세계.
그래서인지 종종 탐탁치 않은 부분도 있었는데, 이를테면 게이 커뮤니티 내에서 누군가를 비하하거나 성적인 모욕을 줄 때 여성적인 부분을 공격한다든지 여성 성기를 비하하는 욕설을 사용한다든지 하는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는 장면(이는 종종 워마드 등이 게이 커뮤니티를 공격하고 비판하는 주된 이유이기도 하다)이 꽤 있다. 물론 소설이 늘 도덕적 당위를 띄어야 하고 정치적으로 올바를 필요는 없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에 대한 적개심이 그대로 드러나있는 인물들이, 그리고 그것을 작가 본인은 인지하지 못하고 있거나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 내게는 몹시 거슬렸던 부분이다. (물론, 이러한 여성혐오적인 측면이 그들만의 고유한 특성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싸잡아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6편의 단편소설에 나오는 등장인물 중 그 누구에게도 매료되지 않았고 인물의 외양과 의복 브랜드 등을 지나치게 상세하게 묘사하는 마치 패션잡지스러운 묘사방식 등은 나의 선호와 꽤 거리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누구를 만나서 섹스하고 사귀고 헤어지는 비슷비슷한 이야기를 이렇게 끝도 없이 다양하게 변주하여 풀어낼 수 있는 부분에는 꽤 감탄했다. 내밀한 사고와 지나치리만치 섬세한 감수성 덕에 인스타그램이나 다이어리에 어울릴만한 매우 ‘예쁜’ 문장이 많은 것도 기억에 남는다.
<여름, 스피드>
더 이상 안달하는 내가 없었다. 그건 어쩌면 조금은 서글픈 감정이었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감정이기도 했다. -p.70
영우가 날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을 때, 그건 오직 한 사람이 날 거부한 것이었지만 나는 세상 모든 사람으로부터 거절딩한 기분이 들었다. 왜 그건 잘 구별이 되지 않을까. 그 마음이 나를 괴물로 만든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애써 구별하지 않았을까. -p.90
<컬리지 포크>
나는 더이상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 사실은 나를 자격 없는 사람으로 만든다. -p.13
<디스코 멜랑콜리아>
당신과 나 사이 가로놓인 마이크 쥔 사람들의 간절한 기도 속에 나도 간절히, 너에 대한 글은 쓰고 싶지 않다고, 제발 너에 대한 글을 쓰게 하지 말아달라고, 끊임없이 밀려드는 버스 뒤에서 너는 보였다가 사라졌다 다시 보이고, 너는 이제 402번 버스를 타고 사라지는데, 당신의 눈으로 보는 나도 점점 더 작이지고 그런 나를 내가 보는데, 그건 다시를 다시 하는 사람의 모습이었고, 당분간 병이 들 사람의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그건 어제 오늘 본 것 중에 가장 아름다웠지, 그리고 그런 내가 정말이지 오랜만에 싫지 않았다. - p.120
<Auto>
전적으로 나에 기대어, 나를 재료 삼아 쓰는 글쓰기, 나를 모르는 사람은 배려하지 않는 배타성, 그 배타적임으로 생기는 내밀함을 나는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때로는 한계를 벗어난 곳에서 실명 없이 설명되기를, 오해로 이해되기를.
나는 명백하게 나이지만 나는 나와 관계없다,
는 아슬아슬하고 은밀한 줄타기가 나는 아주 좋았다. -p.226
나는 어찌도 이렇게까지 나인가, 어쩜 이렇게 또 나인가. -p.2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