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승혜 Oct 25. 2018

‘바보’가 바라보는 세상

<사과는 잘해요>를 읽고



이기호의 <사과는 잘해요>를 읽었다. 사과를 잘한다는 게 무슨 뜻일까? 잘못은 해도 염치는 있다는 건가? 아니면 말은 잘한다는 뜻일까? 이기호의 소설들은 늘 알쏭달쏭하면서 호기심을 자극하는 제목을 하고 있다. 그리고 다 읽은 뒤에는 너무도 적확한, 이 이상의 제목은 없을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나’와 시봉은 복지원에서 한방을 쓰며 양말을 포장하는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시봉은 어느날 가족들이 배가 아파 잠깐 내린 자신을 굴다리 밑에 버려놓고 그대로 떠나간 뒤 복지원 승합차에 실려오게(납치) 되었으며, ‘나’의 경우, 오래전 아버지와 함께 이곳으로 제발로 찾아왔었다. 너무도 오래된 기억이라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지만, 원장실 문 밖으로 새어나오던, “그렇다면 정상이 아니란 말씀이죠?” 하고 왠지 기뻐하는 것 같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귓가에 희미하게 남아있다.

복지원은 원장과 총무과장, 식당 아주머니, 그리고 원장의 조카들이라고 하는 두 명의 복지사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다. ‘나’와 시봉 뿐만 아니라 많은 ‘환자’들이 그들에게 습관처럼 맞았는데, 특히 두 명의 복지사들이 가장 심한 폭력을 행사했다. 그들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매일같이 묻곤 했다. 대답을 못하면 더욱 심하게 맞았기 때문에 우리는 늘 ‘죄’를 고백하고 그것에 대하여 사과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날, 길에서 자다말고 느닷없이 시설로 실려왔다고 주장하는 구렛나룻 아저씨의 등장으로 평화로운(?) 일상은 끝이 난다. 매일같이 “우리는 감금되어 있습니다, 도와주세요.”라고 적은 종이를 돌멩이에 밥풀로 붙여 창밖으로 던지는 아저씨를 보면서, 우리는 똑같이 적은 종이를 양말 포장 박스에 넣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과 언론이 들이닥치면서 복지원은 폐쇄된다.

복지원 폐쇄 후 많은 환자들은 또 다른 ‘시설’로 이송되나 우리는 집으로 가라며 길로 내쫓긴다. 집도 없고 기억도 없는 ‘나’는 집으로 향하는 시봉을 따라 간다. 복도식 임대 아파트 8층에 있는 시봉의 집에는 시봉의 여동생 시연과, 그녀보다 16살이나 많은, 매일같이 경마에 돈을 탕진하는 뿔테를 낀 남자가 함께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나’와 시봉은 늬들도 돈을 좀 벌어와야 하지 않겠냐는 뿔테남의 구박에 일자리를 찾아 나선다. 그러나 가장 잘하는 일이 뭐냐는 질문에 “내부고발이요!” 하고 큰소리로 외치는 우리를 써줄만한 곳은 없었다. 우리는 궁리 끝에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결심한다. 다름아닌 사과하는 일. 다른 것은 몰라도 사과 하나만큼은 자신 있었기에 남들의 사과를 대신 해주기로 한다. 그 뒤의 자세한 내용은 책을 통해 알아보기로 하고...

한동안 페이스북에서 사람이 많이 몰리는 포스팅에 어김없이 나타나던 댓글이 있었다. “형제복지원 생존자 누구누구입니다. 관련자 처벌을 위한 청원에 동참하여 주십시오. 블라 블라.” 형제복지원 사건의 끔찍한 실상이야 매스컴을 통해 대략 알고는 있었으나, 장소를 불문하고 너무 자주 출몰하는 것을 보면서 때로는 짜증스럽기까지 했던 것이 사실이다. 지독히 이기적이지만 솔직한 심정으로는 그랬다. 인간이란 때로 너무나 끔찍한 진실은 외면하고 싶어지는 법이다. 마주보면 고통스러우니까.아예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사과는 잘해요>는 형제 복지원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많은 면에서 해당 사건을 연상시킨다. 납치된 사람들, 감금되어 폭행과 착취를 당하는 사람들, 그 과정에서 죽거나 다친 사람들, 그리고 언론과 세상으로부터 잊혀진 뒤 또다시 어딘가를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너무도 끔찍한 진실은 ‘나’와 시봉이라는 조금은 모자란(?) 이들의 눈을 통해 그려지는 덕에 마주하는 것이 덜 고통스럽게, 마치 블랙코메디처럼 우스꽝스럽게, 그리고 오래 오래 생각나게끔 변모한다.

나와 시봉은 발달이 지체된, 마치 백지와 같은 인물들이다. 타인의 의도를 곡해할 줄 모르며, 곧이 곧대로 받아들인다. 그들에게 있어 규칙은 절대적인 동시에, 약속은 지켜져야만 하는 것이다. “어유, 저 화상, 그냥 없어지면 좋겠어!” 라는 엄마의 말을 듣고 동생을 죽여버리는 어린아이처럼, 그들은, 너무도...너무도....순수하다. 그들의 세계에는 신파도 없고, 자기연민도 없으며, 과장도 없다. 그저 투명하고 정확한 날 것의 세계만이 존재한다.

전에 전도연씨가 인터뷰에서 배우는 다른 사람이 되어보는 과정을 통해 결국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소설가 역시 그런 점에서 배우와 비슷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배우가 캐릭터에 몰입하듯이 소설가 또한 그 자신이 등장인물을 이해해야만 한다. 그런 부분에 있어서 이기호 작가는 마치 누군가의 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마치 빙의 수준으로 인물들을 그려낸다. <사과는 잘해요>는 비록 초기작이긴 하지만 다른 어떤 것보다 그의 그러한 특장점이 잘 나타나 있는 작품이다.

근현대 영미문학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 <소리와 분노>는 4개 챕터 중 하나를 35살의 육체를 가졌으나 정신연령은 5살 어린아이인 벤지의 시선으로 그려낸다. 그 리얼함에 평단으로부터 엄청난 찬사를 받았고 나 또한 매우 좋아하는 작품이다. <사과는 잘해요> 속 ‘나’의 생각은 너무도 리얼하고 그럴 듯해서, 자동으로 벤지를 연상시킬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개중에서도 ‘나’가 시연을 바라보는 한 장면은 특히 압권이다. 저녁 거리에서 성매매 호객행위를 하던 중, 두 명의 남자로부터 쓰리섬을 제안받고 망설이다가, 결국 수락하고 만 시연을 바라보는 ‘나’에 대한 장면. 정말이지 깊은 슬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 밤, 나는 시연이 오랫동안 화장실 안에서 토하는 소리를 들었다. 시봉과 뿔테 안경 남자는 코를 골며 잠들어 있었다. 시연은, 쫄쫄쫄쫄, 소리도 내지 않고, 무언가 목에 걸린 듯 계속 웩, 웩, 소리만 냈다.
나는 두 눈을 비비며, 화장실 문에 귀를 대고 앉아 있었다. 나는 노크를 하고 싶었지만, 그러나 하지 않았다. 머릿속에선 자꾸 둥지에서 떨어진 작은 새 한 마리가 떠올랐다. 내가 노크를 하면, 다리를 절뚝절뚝거리며, 어디론가 퍼득퍼득, 날아오르려 애쓸 것만 같았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나는 계속 두 눈을 비비며, 화장실 문 앞에 앉아 있기만 했다.
화장실에선 훌쩍훌쩍 우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엄마, 하는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작은 새는 오랫동안 혼자 울었다.” -p.124-125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가 여행기에서 기대하는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