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지 못하는 모든 신들에게>를 읽고
지극히 일상적이어서 잔혹한
정이현의 <알지 못하는 신들에게>를 읽었다. 정이현은 박완서 이후에 좋아하게 되었던 최초의 여성 작가이다. 그 둘에게 중산층의 허위의식과 위선을 폭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은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나서 깨달았다. 아직도 그녀의 데뷔작인 <낭만적 사랑과 사회>를 처음 읽었을 때의 느낌이 잊혀지지 않는다.
정이현의 작품들은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삶 속에 스며든 미묘한 불안과 균열을 아주 잘 포착해낸다는 특징이 있다. <알지 못하는 모든 신들에게> 역시 그러한 특징에서 벗어나지 않는데, 이번 작품에서 그녀는 자녀를 둔 부모라면 모두 한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최근 여러가지 이슈를 불러일으키는 학폭위(학교폭력위원회) 문제를 다룬다. 물론 다른 소설들처럼, 작품 속에서 어떤 가치판단을 하거나 문제점의 해법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고, 무언가로 인해 고민하고, 불안해하며, 흔들리는 개인들이 등장할 뿐이다.
주인공 세영은 지방도시에서 작은 약국을 운영하는 약사로, 학교폭력위원회의 중책을 맡고 있다. 그런 그녀는 학폭위 모임의 시간이 다가올수록 점점 초조해하며 고뇌한다. 피해자도, 가해자도, 그들의 부모도 모두 아는 데다가, ‘동네장사’를 하는 형편인지라 아이들의 삶에 영향력을 끼친다는 사실 자체가 불편한 것이다. 갈등하고 고민하는 그녀의 모습은 소위 말하는 ‘정의’라는 것이 눈 앞의 일로 닥치면 얼마나 감당하기 어려운 것인지, 타인의 생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 얼마나 버거운 일인지를 생각해보게 만든다.
학폭위가 이야기의 전부는 아니다. 소설은 3부로 나뉘어 세영과 세영의 남편, 세영의 딸의 시점으로 각각 전개되는데, 세 명 모두 가족구성원 간 직접적인 갈등이나 다툼이 없었음에도 어딘가 삐걱거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가족이라는 것, 부부라는 것, 일상이라는 것, 그리고 관성이라는 것에 이끌려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개인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면서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피로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전체적으로 ‘나쁘지는 않은’ 소설이었지만 여러 측면에서 아쉬움 또한 남는데, 일단 깊이가 상당히 얕다는 것이 있다. 학폭위도, 세영, 남편, 딸 각각의 고뇌도 아주 조금씩만 건드리다보니 너무 피상적으로만 다룬다는 인상이 있다. 이것은 아마도 현대문학에서 ‘핀시리즈’라는 이름을 달고 나온 이 판형 자체가 굉장히 분량이 짧기 때문인 이유도 있겠지만. 더 중요하게는 오래전 내가 그녀에게 반했던 반짝거리는 위트, 신랄한 냉소, 냉철한 유머를 더 이상은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도 있다. 몇해 전부터 그녀의 인물들이 매우 무력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유머가 빠진 그녀의 이야기는 더 이상 재미있게 느껴지지 않는다.
“세영은 남의 인생에 영향을 끼치는 일은 손톱의 때만큼도 하고 싶지 않았다. 더구나 여기서는. 학폭위에 회부된 아이들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아이들이었다.” - p.18
“그 집 애가 참 착하더라. 단지 안에서 할머니 손 꼭 잡고 다니더라고요. 우리 집 애들 같으면 옆에도 못 오게 할 텐데.”
“손을 애가 잡나요, 할머니가 붙들고 다니는 거죠. 저번에 보니까 중학생 애한테 세 살짜리 대하듯 하던데.”
“그치, 사실 너무 그러면 애 입장에선 힘들지.”
어떤 말들은 그 위에 티끌 하나 날아와 앉기만 해도 와르르 무너질 것 같다. 세영은 더는 말을 보태지 않았다. -p.49
“학폭위 회의에서는 징계의 수위를 더 높여야 하지 않겠냐는 의견과, 아직 어린 학생들이니 관용을 베풀고 기회를 주자는 의견이 팽팽히 맞섰다. 결국 거수 투표에 붙여졌고 기회를 주자는 쪽이 한 표를 더 얻었다. 가해자 측은 결정에 승복했고 피해자 측은 불복했다. 피해자 측은 특히 학급 교체 명령조차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에 대해 분개했다.” -p.111-113
<작가의 말> 중에서
“맹목과 불안 사이를 서성이는 사람에 대해, 일상의 어떤 모습에 대해 쓰려 했다는 것을 완성한 후에 알게 되었다.” -p.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