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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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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혜 Nov 21. 2019

밤의 도서관

내가 다녔던 대학교는 밤마다 도서관 출입구를 전부 봉쇄하곤 했다. 1층부터 5층까지는 자료실 및 열람실(독서실)이 같이 있고, 지하는 열람실로만 구성되어 있었는데, 자정을 기점으로 지하 열람실만 빼놓고 모두 닫아버렸다. 지하에서 1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간이 철문까지도 꽁꽁 걸어 잠갔다. 그 덕에 12시까지 도서관을 빠져나가지 못한 사람은 동이 터 올 무렵인 새벽 6시까지 꼼짝없이 도서관 안에 갇혀 있어야 했다. 아마 여학교라서 방범 문제 때문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지금은 어떨는지, 다른 학교는 어땠을는지는 모르겠다.


밤새 갇혀 있어야 하는데도 남아 있는 사람이 있어? 하고 놀랄 수도 있지만, 의외로 꽤 많았다. 특히 시험기간에는 츄리닝을 입고 입에 칫솔을 물고 다니는 여자애들로 지하가 꽉 차곤 했다. 공부는 해야 하는데 집에 가면 자거나 딴짓을 할 것이 뻔하므로 자진해서 셀프 감금들을 했던 것이다. 나 역시 벼락치기를 해야 할 때 종종 도서관에서 밤을 새웠다. 사실 그다지 효과적이지는 않았지만.


12시에 문을 폐쇄할 때만 하더라도 오늘 밤 시험 범위를 전부 독파하고야 말겠다! 던 굳은 결심은 새벽 2시쯤 되면 서서히 허물어지기 시작해서, 3시 반쯤 되면 그야말로 돌아버릴 지경이 되었다. 머리는 안 돌아가는데, 허리까지 아프고, 이곳저곳 좀이 쑤시고, 게다가 실내 공기는 몇 백 명이 내뿜는 이산화탄소로 그야말로 탁하기 그지없는 상태. 잠깐 누워서 눈이라도 붙일까 싶어 주위를 둘러보지만 몇 안 되는 소파 자리는 진작에 발 빠른 누군가들의 차지가 되어 있었다.


실은 소파 자리를 차지하려면 거의 1시경부터 움직여야 했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지만 그냥 집에 가서 자지 뭐하러 거기에 있었나 싶은 생각도 든다. 아예 작정하고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누워있는 아이들도 있었다. 이럴 때 잠깐 나가서 바깥공기라도 쐬고 오면 한결 기분도 전환되고 잠도 깨고 좋으련만, 적었다시피 도서관의 철문은 아침까지 잠겨서 꼼짝도 하지 않았으므로 방법이 없었다. 너무 시간이 가질 않아 지하 열람실 구석구석을 정처 없이 빙글빙글 돌았던 적도 있다.


그렇게 돌아다니던 어느 날 신기한 광경을 보았다. 지하에는 매점도 있었고, 당연히 음식이 들어있는 진열장을 포함하여 모두 닫아건 상태였지만, 어쨌든 그 공간만은 오픈되어 있었는데, 이 매점의 어두컴컴한 한쪽 구석에서 수상한 움직임을 발견한 것이다. 멀리서 보고 뭐지? 도둑인가? 싶어 다가갔다가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매점 구석에 복사기가 있고, 그 뒤쪽으로는 좁고 긴 시스템창이 있었는데, 그 창문으로 누군가가 상반신을 집어넣고 발버둥 치고 있었다. 옆에서는 다른 사람이 그 버둥거리는 다리를 위로 밀어주고 있었다. 얼마 안 있어 버둥거리던 다리 두 개가 창문 밖으로 사라졌다.


알고 봤더니 그 창문은 도서관 죽순이들 중 아는 사람들은 아는, 말하자면 감금된 도서관에서 탈출하기 위한 개구멍 같은 것이었다.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가야 하고 약간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만 하려고 들면 불가능하지는 않았던. 그것을 발견한 순간 마치 빛을 본 것 같았다. 바로 이거다!


자리에서 짐을 모두 챙긴 뒤 친구 하나를 불러 그곳으로 갔다. 창문을 열어 짐이 든 가방을 위로 던져 넣고, 친구에게 다리를 밀어달라고 부탁했다. 좁은 창으로 상체를 집어넣고, 다리를 끌어올려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렇게 만난 바깥공기는 얼마나 신선하고도 상쾌하던지. 그 순간만큼은 마치 쇼생크 탈출의 앤디가 된 것 같았다. 기분이 너무나 좋았다. 이것이 자유의 맛인가. 미리 던져둔 가방을 메고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집에 가서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푹신한 침대에 누워야지.


그러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지하철 역에 도착하니 입구가 막혀 있었다. 그제야 놀라서 새삼스레 시간을 확인하니 아직 새벽 4시. 첫 차가 다니려면 한 시간도 넘게 남은 시각이었다. 개구멍을 발견한 기쁨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저 밖으로 나와 버린 것이다. 그렇게 지하철 역 앞에서 두 팔로 몸을 감싸 쥐고 20여분쯤 벌벌 떨었었나. 아직 주변은 깜깜했고, 날은 추웠다. 주머니에는 돈이 한 푼도 없었다. 그때는 신용카드 같은 것도 없던 시절이고. 결국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갔다. 터덜 터덜 걸어서, 도서관 앞까지 가서, 아까 나왔던 개구멍을 통해,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가끔 사는 게 그때 그 시절하고 하나도 달라지지 않은 것 같을 때가 있다. 물론 그중에 어느 시점인지까지는 잘 모르겠고. 도서관 안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는지, 개구멍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가려고 하는지, 그러다 개구멍을 열고 도로 안으로 들어오려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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