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며칠 전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동물이든 아무튼 일정한 형태를 갖춘 것이라면 모두 입자로 구성되어 있는데, 놀랍게도 그 입자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계속 떠돌아다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 누군가 그것을 인식하고 지켜보려고 하면, 그 순간 갑자기 현재의 형태로 다시 수렴하게 된다고. 간단하게 줄이면 내 옆에 있는 핸드폰은 내가 쳐다볼 때야 비로소 핸드폰이 되는 것이고, 그전까지는 핸드폰의 형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처음에 듣고서는 대체 뭔 말이냐며, 요즘 물리학은 철학이나 문학까지 하느냐며 웃었는데, 기계를 통해 실험을 해 본 결과 저런 현상이 실재했다고 한다. 책상이든, 문짝이든, 컴퓨터든, 주변에 아무도 없을 때는 입자가 형태 없이 파동처럼 흘러 다니다가, 누군가가 그것을 딱 쳐다보는 순간, 우리가 아는 책상, 문짝, 컴퓨터의 모습으로 순식간에 모여드는 현상을 보였다고 한다. 그게 너무 신기하고 이상해서 최근 물리학계 내에서도 난리가 났다는 것이다.
소리 역시 마찬가지라서 그것을 들어줄 사람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다고 한다. 즉 아마존 밀림 같은 곳에서 나무끼리 서로 부딪혀 어떤 소리가 난다고 하더라도 누군가 듣고 인식하기 전까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정말로 그렇지 싶었다. 현재 내 귀에 들리지 않는 소리는 존재를 알 방법이 없다. 내 귀에 들리지 않더라도 누군가 다른 사람이라도 들어주면 괜찮지만 만약 그것도 아니라면, 대체 누가 그 소리를 증명할 수 있겠는가.
좀 전에 라디오를 듣는데 비슷한 이야기가 또 나왔다. 오늘 서울에 눈이 왔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첫눈이라고 기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상의 첫눈은 지난 11월 15일 경 이미 내렸었다고 한다. 진눈깨비 형태라 많이들 몰랐어서 그렇지 어쨌든 기록상의 첫눈은 그날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첫눈’의 정의가 재미있다. 강남도 아니고, 용산도 아니고, 신촌도 아니고, 반드시 종로에 있는 관측소에서 관측 담당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 해 최초로 내린 눈이어야만 한단다. 만에 하나 담당자가 잠깐 화장실을 가거나 자리를 비우거나 잠이 들거나 하는 사이에 내리면 첫눈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무도 보아주는 사람이 없을 때는 설사 첫눈이 내리더라도 첫눈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정말이지 김춘수의 시가 따로 없는 이야기다. 새삼 누군가를 인지하고, 무언가를 기억하는 것은 엄청난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인지하거나 기억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고, 인지하고 기억하는 순간 그것은 전부가 되는 것이다.
“우리들은 모두 / 무엇이 되고 싶다. /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김춘수,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