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 디 아일>
책도 그렇고, 영화도 그렇고, 읽거나 보면서는 재미있다는 생각을 하지만 끝난 직후에 바로 휘발되어버리는 - 심지어는 봤는지 안 봤는지를 까먹을 정도로 - 것들이 있고, 보고 있는 그 순간에는 별다른 감흥이 없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더 선명해지는 작품들이 있다. 영화 속 어떤 장면, 그때 흐르던 음악, 그 순간 나를 스쳐가던, 스스로도 몰랐던 감각과 감상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되살아난다.
<인 디 아일>은 후자다. 올해 상반기쯤 왓챠가 취향에 맞을 거라고 추천을 해줘서 보게 되었다가 도대체 뭘 보고 추천한 거냐 하면서 몇 번씩 포기했던 영화였는데, 지난달에 다시 시도해서 결국 끝까지 보게 되었고, 본지 한 달이 넘도록 계속해서 생각하고 있다. 어째서 이 영화가 잊혀지지 않는지, 영화 속 무엇이 내 마음을 건드렸는지, 무엇 때문에 다른 일을 하다가도 자꾸만 특정한 장면이 떠오르는가에 대해서.
이 영화는 자극적인 플롯이나 스펙타클한 액션, 마음을 뭉클하게 하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맞지 않는다. 서사 자체가 명확하지 않고, 별 다른 갈등 구조가 없다. 그냥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이야기일 뿐이다. 심지어 배경은 독일의 대형 마트인데, 뭐랄까 정말이지 독일스러운 영화였다. 굳이 줄거리를 말하자면 주인공이 마트에 견습생 신분으로 들어가 정직원이 되기까지의 과정 정도.
영화는 주인공 브루노가 마트에 견습생으로 취직해서 사람들을 소개받는 것으로 시작한다. 원래 대형마트의 운영방식이 저러한지, 독일이라서 남다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직원들은 손님들이 모두 퇴장하고 영업을 종료한 시점에도 매장 안을 정비하고 이런저런 잡일을 하면서 매장 안에 남아 있는데,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텅 빈 매장에 크게 울려 퍼지도록 플레이하기도 하고, 체스를 두기도 하고, 시시껄렁한 잡담을 하기도 한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상영시간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리고 그런 장면들의 사이사이에 아주 어설픈 사랑이 태어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며, 기쁨과 슬픔, 분노와 원망, 연민과 동정, 그리고 사람들 사이의 우정과 연대와 같은 감정이 흐릿하지만 확연히 알아볼 수 있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흥미로운 지점은 그러한 모든 감정의 밑바탕에 기본적으로 고독감이 아주 진하고 두껍게 깔려 있다는 것.
사람들은 외롭기 때문에 서로를 사랑하고, 외롭기 때문에 그 사랑을 끝내버리고, 외롭기 때문에 기뻐하기도, 슬퍼하기도 하며, 외롭기 때문에 서로에게 분노하기도, 원망하기도 한다. 동시에 외롭기 때문에, 그리고 서로가 그렇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서로를 동정하고 연민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 사랑과 원망과 분노와 연민을 반복하는 사이에도 그것의 원인인 ‘외로움’은 결코 해소되지는 않는데, 그래서인지 영화를 보는 내내 등장인물들이 ‘섬’ 같다는 생각을 했다. 다들 너무나 고독한데, 외로워서 힘들어하는데, 도저히 어떻게 해도 그 거리가 좁혀지지 않으니까. 또한 앞으로도 좁혀지지 않을 테니까.
그렇지만 생각해보니 이 ‘고독감’은 비단 영화 속 주인공뿐만 아니라 그냥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모든 사람에게 공통으로 해당되는 것 같기도 하다. 나의 마음은 결국 나밖에 알 수 없다.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진짜 마음이라기보다는 언어의 형태로 옮겨진 마음일 뿐이다. 그것이 진짜인지 아닌지 상대는 결코 알 수 없다. 상대의 마음 역시 나는 알 수 없다.
나 외에 다른 사람의 마음은 평생이 가도록 명확히 알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직접적으로 가서 닿을 수도 없다. 물론 안다고 느껴지는 경우도 있지만 그 역시 언제나 짐작일 뿐이다. 그러니까 물리적으로 누군가와 함께하는 순간이라 할지라도, 겉으로는 아무리 웃고 떠들고 행복감을 맛본다고 할지라도, 그 안의 마음은 혼자 있을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 누군가와 함께 있어도 외로움을 느낀다는 것은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사는 것은 결국 외로움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익숙해지는 과정인 것 같다. 사실 사람들의 행동 역시 대부분은 결국 외롭기 때문인 경우가 많고. SNS를 하는 것도, 셀카를 찍는 것도, 영화를 보고 책을 읽는 것도, 친구를 만나는 것도, 화를 내는 것도, 누군가를 괴롭히고 고통을 주는 것도, 원망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도, 결핍과 고통이 생기는 것도.
영화 속에서는 인물들이 외로움을 해소하는 방법 중의 하나로 지게차를 등장시킨다. 브루노의 동료 마리온은 어느 날 브루노에게 다가와 말한다. 예전에 브루노의 선배인 크리스티안이 자기가 힘들어할 때 이야기해줬다면서, 지게차를 하강할 때 잘 들어보면 파도소리가 난다고. 그렇게 두 사람이 파도 소리로 가장한 지게차 소리를 듣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나는데, 영화를 보고 나서 마음이 참 쓸쓸하면서도 단단해진 느낌이 들었던 것은 아마도 이 파도소리 덕분이었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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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T가 너무나 좋은 영화였다. 왓챠를 통해서 봤지만 상영관에서 봤으면 아주 좋았겠단 생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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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한 사진은 내가 아는 모든 영화를 손꼽아 가장 로맨틱한 장면 중 하나. 등장인물 둘 다 소심하고 상황이 여의치 않아 감정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데, 그러던 와중에 가장 직접적이고 적극적이고 결정적으로 표현된 순간이랄까. 냉동창고 안에서 에스키모식 인사를 하는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