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 친구분께서 고도의 알탕물은 BL물과 구분이 잘 안 간다는 이야기를 어디에선가 보셨고, 그게 아주 흥미롭다는 글을 적으셔서 거기에 댓글을 달았다가 좀 긴 내용이라 따로 포스팅으로도 남겨둔다.
참고로 ‘알탕물’은 남성들이 잔뜩 나오는 영화나 드라마에 대한 일종의 은어 되시겠다. 어디에서 유래된 단어인지야 뭐 뻔하고. 딱히 서사가 있는 작품만이 아니라 예능도 포함이 될 텐데, ‘아는 형님’류의 프로그램을 생각하면 단번에 연상이 될 것이다. 그리고 BL은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Boys Love의 앞글자를 딴 명칭으로 남성과 남성 사이의 성애를 그린 일종의 장르물을 통틀어 가리킨다.
물론 BL은 단순한 알탕물과는 결이 많이 다르긴 하다. 알탕물이 남자들이 자기들끼리 지지고 볶고 서로 좋아 죽는 내용이라면 BL은 그러한 남성들을 여성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대상화하는 것이니까. 가끔 BL을 퀴어나 동성애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BL은 이와 완전히 다르다.
여성들이 BL을 좋아하는 데는 섹슈얼한 자극을 원하지만 감정이입이나 대상화 없이 어디까지나 완벽한 관찰자로 머물고 싶다는 이유가 있다. 여성에게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폭력적이고 강압적이고 누군가를 지배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는데 그걸 할리퀸과 같은 이성애 로맨스는 해소해주지 못하니까. 남성이 여성을 강간하는 설정은 일단 여성 독자를 불편하게 만드니까. 그렇다고 여성이 남성을 강압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기도 하고. 거기에서 나온 게 BL이다.
초기의 BL의 시작은 아이돌 그룹 팬픽으로부터 나왔지만(내가 좋아하는 오빠들이 등장하는 소설을 읽고 싶다! 하지만 여자가 나오는 건 싫어! 그러니까 남자끼리 좋아하는 걸로 하자!) 결국 그게 여성들 안의 폭력적이고 섹슈얼한 욕구까지 해결해주는 형태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작품이 여성향 포르노에 가까운 형태를 띤다.
나 역시 고도의 알탕물은 BL과 구분이 안 된다는 지적에 동의한다. 오래전부터 해온 생각인데, 나는 실제로 대부분의(모두라고 하지 않았음. 어디까지나 대부분의) 남성들이 여성보다는 남성을 더 사랑하고 있다고 믿는다. 각종 남성연대를 비롯하여 수많은 단톡방, 남자들끼리의 모임을 살펴보면 서로가 서로에게 그렇게 끈끈하고 다정할 수가 없다. 물론 그들은 퀴어가 아니며 대개는 이성애자다. 또한 여성을 싫어하지도 않고 여성과의 섹스를 매우 좋아하기도 한다. 정준영 같은 애들처럼 말이지.
그러나 그들이 여성을 좋아하는 방식과 남성을 좋아하는 방식은 아주 큰 차이가 있다. 여성은 어디까지나 1차적이고, 단순하고, 기본적인 생리적 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찾는 반면, 고차원적이고 정서적이고 지능적인 욕구는 모두 같은 남성을 통해 충족시킨다. 단적으로 말하면 여성에 대한 애정은 마치 강아지나 길가의 들풀처럼 그저 ‘예쁜’ 것에 대한 기본적인 흥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반면, 같은 남성을 대상으로는 그렇게 깊고 절절한 존경과 애정이 넘칠 수가 없는 것이다.
수없이 많은 ‘알탕물’에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고, 여성과의 섹스가 등장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남성들 간의 연대를 공고히 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일 뿐이다. 심지어 <불한당> 같은 영화에서 설경구는 자기가 사랑해 마지않는 동생인 임시완의 출소를 기념하며 금발 벽안의 미녀를 일종의 트로피처럼 준비하고, 차 안에서 그들이 섹스하는 장면을 지켜보며 흐뭇해하기까지 하는데, 여기서 임시완이 금발 벽안 미녀랑 섹스를 나눴다고 ‘여성’을 진짜로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영화 속에서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동등한 감정은 오직 설경구와 임시완 사이에서만 존재했다. 금발 벽안의 미녀는 누구로든 대체 가능한 1회용품 같은 존재였을 뿐이고.
아주 오래전 소크라테스가 활동하던 중세 그리스 시대에는 남성과 남성 간의 사랑만이 진정 고귀한 사랑으로 인정받고 여성과 남성 간의 사랑은 종족 번식을 목적으로 평생 동안 몇 번 하지 않는 아주 미천한 행위로 치부되었는데, 오늘날에도 그 근본적인 흐름 자체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생각이다. 여전히 ‘대다수의’ ‘보편적인’ 남성들은 오직 같은 남성만을 대등한 존재로 인정하고 있다. 많은 남성들이 오직 같은 남성하고만 야심과, 꿈과, 지식과, 정치적 의견과, 진지한 속마음과, 우정을 나눈다. (주의: ‘모두’라고 한 적 없음. 어디까지나 ‘대부분의’)
예를 들어 수많은 예능, 이를테면 국민 MC라 불리는 어떤 남성 개그맨만 하더라도 그의 사단에는 오로지 남성들만이 포함되어 있다. 나는 그가 여성 개그맨들을 그의 후배 남성들만큼 큰 신경을 쓰고 이끌어주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는 대한민국 누구보다도 남자를 사랑하는 남자 중 한 명처럼 보인다. 남성 후배들에게 늘 경외와 선망과 존경의 대상인 그가 여성 후배들에게는 어떨는지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