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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혜 Mar 03. 2020

사랑의 실체

어제 아이들 재우고 새벽에 일하는데 자꾸 잠이 쏟아져서 더 버티지 않고 자려고 누웠더니 다시 말똥 해지면서 잠이 안 오는 것이다. 그래서 어라? 하고 책을 펴면 다시 잠이 오고, 덮으면 도로 말똥 해지고. 하는 수 없이(진짜임) 넷플릭스를 켜서 메인 화면에 뜬 <러브 이즈 블라인드>라는 프로그램을 별생각 없이 보기 시작했는데, 생각 외로 엄청 재미있었다. 아직 1회밖에 보지 않았지만.

제목에 들어가는 ‘러브’만 봐도 알겠지만 남자 여자 각각 열댓 명씩 참여해서 서로의 파트너를 찾는 리얼리티 쇼인데 설정이 상당히 골 때린다. 짝짓기 프로그램인데도 출연자들은 서로 만날 수 없다. 성별을 기준으로 나뉜 각각의 숙소에 머무는 남녀는 하루 단 한 차례 불투명한 유리로 막혀 있는 이상한 방 같은데 들어가서 나누는 대화로만 서로를 파악해야 한다. 그렇게 몇 주동안 대화만 나누다가 이 사람이다! 싶으면 청혼을 하고, 수락을 하고, 그렇게 약혼을 한 상태로 숙소를 나간 뒤 한 달 이내에 결혼을 해야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상대의 외모라든지, 인종이라든지, 사회적 배경이라든지와 무관하게 누군가의 ‘진정한’ 내면만을 발견할 수 있는지, 그 ‘내면’만으로 사랑에 빠질 수 있는지, 나중에 방 밖으로 나가 서로의 ‘실체’를 확인한 뒤에도 그 사랑이 유지될 수 있는지를 지켜보는 일종의 실험인 셈.

처음에는 아무리 리얼리티 쇼라지만 진짜 어처구니가 없다, 이게 가능할까, 이딴 걸 하는 사람들이 있나 싶은 생각이 들지만, 보다 보면 놀랍게도 실제로 그런 일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만난지, 아니 대화를 나눈지 3일 만에, 심지어 15명을 하루에 한 번씩 다 돌아가면서 만나려면 아무리 길어봐야 1시간 남짓의 대화를 몇 차례 했을 뿐인데, 참가자들은 실제로 사랑에 빠진다.

사랑을 고백하고, 눈물을 흘리고, 얼굴도 보지 못한 상대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끼고, 질투를 하고, 이런 감정 처음이라고, 자기는 사랑에 빠졌다고 아주 난리 부르스를 피우고 오만 호들갑을 다 떤다. 처음에는 어떻게 한결같이 저렇게 이상한 애들만 있지? 싶은 생각을 했는데, 애초에 이런 ‘실험’에 좋다고 참여하는 것부터가 보통의 멘탈은 아닐 것이므로 일견 당연하다 싶기도 하고.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인간의 보편적인 모습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인물들이 평균 이상으로 과장되어 있고, 사랑에 빠지는 과정이 너무나 압축되어 있긴 하지만, 사실상 사람들이 사랑에 빠지는 모습 역시 저들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상대에게 자신과 비슷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감지하고, 그때부터 어떤 친밀감을 느끼고, 그것이 보다 특별한 어떤 감정으로 발전하고,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보다 가까워지고 싶은 욕구를 느끼게 되는 어떤 수순. 일반적으로 누군가를 만나게 되는 경우도 그렇고, 소개팅을 한다거나, 미팅을 한다거나, 예전에 스카이러브나 나우누리에서 채팅 만으로 사랑에 빠지는 사람들 있었는데 모두 마찬가지.

이런 걸 보면 인간이란 굉장히 외로운 존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산다는 것은 늘 외로운 일이고, 외로운 만큼 누구나 마음 한 켠에서 무언가를 항상 갈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무언가’를 살짝 건드려주기만 하면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건 사실 일도 아닌 것이다. 마치 파블로프의 개가 종소리만 듣고 침을 흘리는 것처럼 특정한 조건을 조절하면 아주 쉽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다.

애초부터 본인이 사랑에 빠지기로 결심한 사람들이라면 더 쉽겠지만 꼭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라도 마찬가지. 그런 차원에서 ‘운명적’ 사랑 같은 것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그냥 ‘타이밍’이 그렇게 되면 누구나 사랑에 빠질 수 있다. 물론 그런 ‘타이밍’ 자체가 운명일 수도 있겠지만.

재미있는 것은 출연자들이 한결같이 여러 번 거듭해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싶다” 는 말을 반복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있는 그대로”라는 말이 의미심장하다. 실상 “있는 그대로”의 나라는 것은 무엇인가. 외모를 뺀 나? 사회적 배경을 제외한 나? 인종이나 젠더를 지워버린 나? 그런데 만약 내가 흑인으로서 인종차별에 대한 괴로움을 가지고 있다면, 특정 지역 출신으로 그에 대한 컴플렉스나 결핍을 지니고 있다면, 그것을 지워버린 나 역시 진정한 나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을까?

한편 세간의 기준으로 ‘위선적인’ 혹은 ‘가식적인’이라는 평가를 듣는 사람을 생각해보자. 예를 들어 SNS에서 주구장창 무언가를 주장하는데, 실제 행동은 그와 전혀 다른 사람. 이때 ‘진정한’ 그 사람은 무엇일까. SNS에 나타나는 모습? 아니면 현실 세계에서의 모습? 그도 아니면 “가식적으로 보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보이고 싶어하는” 욕구?

이 중 무엇도 그의 ‘진정한’ 모습이라고 할 수 없고, 무엇도 아니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이란 그처럼 실체 없는 모호한 개념이다. 그럼에도 모든 출연자가 그것을 찾아 헤맨다는 사실이 참 재미있다. 어쩌면 ‘사랑’은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실체와 만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지도 모른다.

결국 인간은 자기를 사랑하고 싶어하고 자기를 이해받고 싶어하기 때문에 사랑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자기 자신과 사랑에 빠지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고 너무도 자주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에 시달리기 때문에 대신 사랑해줄 수 있는 누군가를 찾아 헤매고 있는 것이다. 사실은 꼭 메이팅의 차원이 아니더라도 인간이 하는 모든 활동이 마찬가지인 것 같기도 하고. 예술 활동도 그렇고, 우리가 내는 모든 목소리도 그렇고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모두 ‘발견되어지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는 것. 그리고 ‘발견되어지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

아까 ‘사랑’이 운명도 뭣도 아니고 그저 호르몬과 뇌하수체에 의해 파블로프의 개처럼 특정한 상황 하에서 조건 반사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그 감정 자체를 하찮게 치부하지는 않는다. 호르몬의 작용이든, 뇌가 일으키는 착각이든, 일시적인 충동이든 어쨌든 사랑이라는 감정이 주는 희열은 아마 그 자체로 진실일 것이다. 설탕이 그저 화학물질일 뿐이든 녹아서 없어지든 열에 취약하든 어쨌든 먹었을 때 달콤하다는 사실이 변하지 않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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