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번의 일>
<먹고 사는 문제>
작년 재작년 최저임금에 관한 논쟁이 한창 뜨겁던 무렵, 직원들 시급 1만 원도 못 맞춰줄 사람은 처음부터 사업을 시작하지를 말았어야 한다는 비난을 종종 보곤 했다. 최저임금 이슈가 함량 미달의 자영업자들을 구조 조정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 역시도 비슷한 생각을 하곤 한다. 그래서 엊그제 올린 <멀티팩터> 서평에서도 회사원들은 어지간하면 개인사업 따위는 꿈도 꾸지 말고 가능한 회사에 딱 붙어 있는 것이 좋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고.
그러나 그 많은 자영업자들 중 “나도 한국의 마크 주커버그가 되어야지” 혹은 “나도 백종원처럼 되어야지”와 같은 원대한 포부를 안고 자발적으로 자영업의 길로 나선 사람들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따박따박 나오는 월급의 소중함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나. 대개는 버티고 버티고 버티다가, 도저히 안 되겠으니까 떠밀리듯 나오게 되는 것일 테지. 그렇게 나와서 하는 수 없이 손님이 없는 피시방을 차리거나, 동네에 이미 10개도 넘는 치킨집의 개수를 한 개 늘리거나, 한 골목에만 연달아 4~5개씩 있는 카페 중 한 곳의 주인이 되거나 하는 것일 테고.
이런 이야기를 하면 그러니까 누가 그렇게 쉽게 그만두래? 그래도 버텨야지! 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알다시피 회사나 조직은 극강의 효율을 추구하는 집단이다. 일단 사람을 내보내기로 결심한 순간부터는 어떠한 자비도 동정심도 없다. 오직 정해진 목표를 향해 달려갈 뿐이다. 평생 기획과 마케팅 일을 해오던 사람을 졸지에 고객센터로 내려보내거나, 서울에서 근무하던 이를 산간벽지로 보내버리거나, 책상을 빼버리거나, 조직을 개편한답시고 한참 후배를 조직의 리더로 앉힌다거나 등등. 그러면 좀 전까지만 하더라도 누가 쉽게 그만두래? 하고 목청을 높이던 사람들이 잠시 조용해지며 숨을 고르다가 이런 말을 할지 모른다. 좀 어렵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버텨야 하지 않겠냐고. 남의 돈 먹는 게 쉬운 일인 줄 아느냐고. 드럽고 치사해도 참아야 하지 않느냐고.
그러나 사실 선입견과 다르게 대다수의 사람들은 위와 같은 극강의 조치에도 그리 쉽게 물러서지는 않는다. 권고사직을 받았다고 그 길로 털고 나와서 퇴직금 받은 걸로 편의점이나 차려야지, 하고 결심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후배를 상사로 앉혀버리거나, 책상을 빼 버리거나, 산간벽지로 보내버리거나 하는 드럽고 치사한 조치에도 끝끝내 버티는 사람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다는 말이다. 김혜진의 <9번의 일>은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되는가에 관한 소설. 그렇게 버티고 버티고 버티다가 끝내 어떤 일을 당하게 되는가에 관한 소설. ‘일’이라는 관념이, 먹고살아야만 한다는 굴레가, 한 개인을 어떻게 몰고 가는가에 관한 소설.
평생을 통신사의 기술원으로 일해온 주인공은 어느 날 부장으로부터 호출당해 권고사직을 받는다. 그보다 훨씬 어린 부장은 이만하면 좋은 조건이라고 그를 설득하나 그는 완강하게 버틴다. 물론 권고사직을 거부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는 알고 있다. 2주가량 진행되는 교육을 받고, 교육과정에서 자기계발서와 경제경영서적을 읽은 뒤 기획서를 제출해야 하며, 그것을 바탕으로 성과평가를 받아야 하고, 성과평가가 함량 미달일 경우 업무 배치가 변경되는 과정을 겪어야 한다.
몇십 년간 몸을 쓰는 일을 해온 사람에게 경제 경영서적을 읽고 기획안을 쓰라니. 그는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지만 그렇다고 마냥 쉽게 물러설 수만은 없다. 작년에 무리하게 대출을 받아 장만한 다세대 주택은 계속 말썽이고, 아직 중학생에 불과한 아들의 교육비를 생각하면 앞날이 깜깜하며, 마트에서 2교대로 일하는 아내는 손목이 아파 수술을 받아야 하고, 거기에 한술 더 떠 장인어른은 무릎 수술을 받으셔야 한다.
왜 장인 어르신 수술비용을 내가 책임져야 하나? 하는 억울함이 종종 치밀어 오를 때도 있으나 오래전 처음 집을 장만할 때 장인어른이 도와주셨던 점을 생각하면, 평생을 맞벌이로 살아온 자신들 부부를 위해 장인어른 내외가 아이를 돌보아 주신 것을 생각하면 억울한 마음 자체가 죄송할 만큼 그에게는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시골에서 형이 모시고 있는 홀어머니에게 들어가야 하는 돈도 끝이 없으니.
결국 재교육 과정에서 최저 평가를 받은 그는 산간벽지 지방의 영업사원으로 발령이 난다. 실적이 좋으면 다시 올라올 수 있다고는 하나 영업 따위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기술직원이 비닐하우스 가득한 시골에서 통신망을 팔 수 있을 리가 없다. 당연히 거기에서도 계속해서 저조한 성과만 내고, 그런 식으로 조금씩 조금씩 더 바깥으로 떠밀려가게 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어느덧 아내를 비롯한 주변에서 그냥 적당히 퇴직금 받아서 나오라는 이야기를 하는 수준에까지 이르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그것도 쉽지 않다. 지금껏 수많은 모멸과 수모를 버티며 견딘 것이 억울해지는 것이다. 그는 마침내 노조에 가입하고, 회사는 이번 프로젝트만 성공하면 그를 원래 하던 업무로 돌려보내 주겠다며 오지로 보낸다. 그는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결심으로 회사가 지정해준 근무지로 향한다. 그리고 그런 그를 맞이한 것은 송전탑 설치를 반대한다고 주민들이 날마다 시위를 하는 현장이었다.
소설 내에서 명확하게 배경이 제시되지는 않지만 밀양 송전탑에서 모티브를 받은 것이 틀림없는 이야기였는데, 읽으면서 참 만감이 교차했다. 누구 하나 악인이 없음에도, 모두가 더 나아지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음에도, 각자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할 뿐인데도 모두가 점점 더 밀려나고 추락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면하는 것이 너무나 괴로웠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바로 그런 점이 문학의 효용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세상사는 단순하지 않고 사람들은 복잡한 존재이며, 그 무엇도 절대적으로 나쁜 것도 선한 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것. 누구도 쉽게 비난할 수 없도록 하는 것. 그 복잡하고 다면적인 실체의 일부분이나마 엿볼 수 있도록 해주는 것. 사건을 일방적인 피해자와 가해자의 구조로 나누지 않고, 그 과정에서 구조적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놓인 개인들의 내면을 보여주는 것. 오직 소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흔히 나쁜 소설은 독자로 하여금 책에 질문을 던지게 만들고(여기서 주인공이 왜 이런 행동을 하는 거지? 왜 집안에서 신발을 신고 다니지? 왜 이야기가 이런 방향으로 흘러가지? 등등), 좋은 소설은 독자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게 한다는(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이야기가 있는데, 이 소설은 명백하게 후자였다. 이 소설은 끊임없이 우리가 이 상황에 놓였더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묻는다. 물론 직접적으로 묻는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생각을 하게 만든다.
만약 내가 부하에게 사직을 권고해야 하는 상사의 입장이었다면, 만약 내가 권고사직을 받게 된다면, 만약 내가 용역 깡패로 일하면서 마을 주민과 싸워야 하게 된다면, 만약 동료나 나 둘 중 하나만 살아남을 수 있는 상황이 온다면, 만약 내 동료가 그런 과정에서 죽게 된다면, 기타 등등. 무엇 하나 쉽지 않은 질문들. 사실 나는 그 질문 중 무엇에도 답을 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