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초 케이트 쇼팽의 <각성>이란 소설을 읽다가 소설 속 주인공의 캐릭터나 행동거지가 실존인물인 나혜석과 너무도 흡사한 것을 보고 깜짝 놀랐던 적이 있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잘(?) 살던 부인이 무언가를 계기로 각성한다. 그러면서 자아를 되찾기 위한 투쟁을 시작하고, 예술 및 창작활동을 통해 자아를 발현시킨다. 한편으로는 남편 이외의 남자와 자유연애를 한다.... 등의 흐름이 거의 완벽하게 일치했던 것이다.
심지어는 세간에서 미쳤다는 평가를 들으며 곤경에 처하는 부분까지도 완전히 똑같았다. 물론 <각성>의 주인공과 작가인 케이트 쇼팽의 실제 삶은 조금 달랐지만. 케이트 쇼팽의 경우 남편 사후 아이들을 부양하기 위해 소설을 썼다고 한다. 허나 연애 등은 계속했고, 그런 가운데 끊임없이 구설수에 올랐다고.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케이트 쇼팽도 나혜석도 당시 예술가로서 꽤나 혹독한 평가를 받았다. 예술활동보다는 사생활적인 측면이 과하게 부각되었고, 작품 또한 ‘정신 나간 여자들’이 쓰고 그린 것으로 치부되어 오랫동안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죽음의 과정 또한 순탄치 않았던 둘은 사후 100년 이상이 경과된 뒤에야 재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당시 신기할 정도로 흡사했던 두 여성의 삶을 비교해보며 참으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어딜 가나 남보다 빠르게 ‘각성’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깨달음부터 여성의 삶은 얼핏 보기에는 다른 듯해도 큰 틀에서는 대개 비슷했구나 싶은 약간의 울적한 마음에 이르기까지.
그러면서 또 다른 의문이 들기도 했다.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태어나 다른 문화권에서 자란 두 사람(케이트 쇼팽은 1850년 미국 세인트 루이스에서 태어났으며, 나혜석은 1896년 경성에서 태어났다)이 이토록 비슷한 생각을 했다는 것은, 어쩌면 이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여성들이 실제로는 훨씬 더 많았다는 방증이 아닐까? 과연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케이트 쇼팽과 나혜석 뿐이었을까? 왜 그 밖의 다른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는 없을까?
물론 미국에는 그나마 버니지아 울프나 조지 엘리엇 등의 여성 작가가 있기는 하다. 그런데 한국으로 오면 이상할 정도로 ‘근대 여성’에 대한 이야기가 없었던 것이다. 모든 것이 오로지 나혜석 한 명에게만 집중되어 있다. 나혜석처럼 외부활동을 즐기던 여성이었으면 당연히 함께 어울리고 토론하고 생각을 나누던 동료들이 있었을 텐데 이런 사람들에 대한 정보 또한 거의 전무했다.
이렇게 된 이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다 보니, 어떤 맥락이 느껴졌다. 이상하게도 나혜석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소위 말하는 ‘페미니스트들’ 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페미니즘을 비판하는 측에서도 늘 나혜석 이야기를 꺼내고 들었다.
그러니까, 나혜석과 케이트 쇼팽은 ‘각성하는 여성’으로서 적합한 사례인 동시에 ‘각성하는 여성’들에게 ‘교훈’을 주고 싶어 하는 남성들에게도 딱 알맞은 캐릭터였던 것이다. 말하자면 조신하게 살림이나 하고 애나 키워야 할 여자가 밖으로 나돌면 어떻게 되는가에 대한 교훈. 나혜석처럼 하다 보면 결국 미치거나, 병들어 죽거나 하는 거야, 알아들었어? 하는 어떤 메시지.
김소연의 <미치지도 죽지도 않았다>는 이런 메시지에 반기를 들고자 쓰여진 책이다. 저자는 어느 문헌에서 ‘’신여성’ 대부분이 미치거나 죽었다’는 늬앙스의 문장을 보고 의문을 품다가 이 책을 내게 되었다고 한다.
이 책은 실제로 굉장한 활약과 직업적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전혀 주목받지 않았던 역사 속 여성 10여 명을 다루면서, 자의식을 가졌다고, 가정 대신 직업적인 성공을 꿈꾸었다고 모두가 ‘죽거나’, ‘미치거나’, ‘망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근대 여성의 삶이 비록 남성에 비해 고단하고 어렵기는 했어도 그 형태가 단일하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많은 남성들이 그러하듯이.
책에서 다루는 사례 가운데에도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남편이 병사하면서 아이들을 건사하기 위해 직업적 노동에 뛰어든 사람도 있고, 아이 따위는 친정에 맡겨둔 채 개의치 않고 학업에 열중한 사람도 있다. 천한 신분으로 태어났으나 무려 남편의 뒷바라지를 받으며 미국 유학까지 마친 인물부터 죽은 남편을 그리워하며 노동운동에 헌신한 사람까지 다양하다.
이들은 지금껏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책 속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최초의 여성 의료인이 되고, 최초로 대학을 졸업하고, 최초로 미국 유학을 가고, 최초로 여성 기자가 되고, 최초로 미용업을 일으키고 하는 등의 업적을 세웠음에도 지금껏 같은 업적을 이룬 남성이 조선 최초의 뭐뭐뭐로 호명될 동안 그 어떤 스포트라이트도 받지 못해 왔다.
그런 측면에서 나혜석과는 어찌 보면 반대라고 할 수 있다. 자유연애를 하는 남성 예술가가 해당 행위로 전혀 이슈를 끌지 못하는 반면 나혜석은 여성이 자유연애를 한다는 사실만으로 이슈가 되었기 때문에. 어쩌면 이러한 책에서 다루는 뛰어난 여성 인물들이 통틀어서 ‘페미니스트’로 퉁쳐지는 것도 비슷한 현상일지 모르겠고. 직업적으로 뛰어난 여성들은 의료인이나, 노동운동가로 명명되는 대신 뜬금없이 페미니스트로 호명되어 버리곤 한다.
전혀 기대 없이 집어 들었지만 예상외로 흥미롭고 즐겁게 읽었고, 근대 여성들에 대한 더 다양하고 전문적인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해 준 책이었다. 재미있긴 하지만 책에서 다루는 것은 인물 한 명당 20여 페이지 남짓의 가벼운 인생사이기에 인물을 입체적으로 조망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아이들이 보는 위인전처럼 느껴지는 부분들도 좀 있었고.
흥미로운 지점은 저자가 건축을 전공하고 가르치는 이라 그런지 당시 건물에 대한 이야기가 꽤나 많이 나온다는 것이다. 건축과 여성이라는 얼핏 이질적일 것 같은 주제를 한데 묶어서 이야기하는데도 의외로 위화감이 없다. 아마도 당시 조선사회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병원이나 교회, 백화점 등의 신식 건축물들이 많이 세워지게 되었고, 그러면서 여성 직업인도 많이 늘어나게 되었기에 자연히 두 가지의 주제가 한데 어우러지지 않았나 싶다.
경성이 배경이 되는 근대의 조선, 여성인물사, 건축물 등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지루하지 않게 읽을 수 있는 책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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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여 년 전 여성에게 인생 역전의 기회가 된 장소는 크게 세 곳이었다. 학교와 교회 그리고 직장.
(...)
초창기에 학교, 교회, 직장을 다닌 여성은 지체 높은 양반집 여성이 아니었다. 빈민의 딸, 기생, 첩, 청상과부 등 전통 사회에서 소외된 여성이었다. 왜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먼저 움직였을까? 역사의 어느 장면에서나 그렇듯 변화의 전제 조건은 불안정과 결핍이다. 기득권을 가진 존재는 안주하기 마련이다. 변화를 원하고 변화가 필요했던 사람들은 비주류였다. 비주류 중에서도 가장 비주류는 가난하고 못 배운 여성이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도 대부분 그런 여성들이다. 거짓말과 도둑질을 일삼던 꽃님이, 가난한 집안의 딸 박에스더와 여메례, 어린 나이에 후처가 된 하란사, 여종 출신 이그레이스, 소박데기 김마르타, 청상과부 이경숙, 차미리사, 조신성, 정종명, 강주룡, 가출 소녀 임형선, 구박데기 강경애, 신여성 최은희, 허정숙, 송계월.
번데기가 나비가 되듯 미운 오리 새끼가 백조가 되듯 그들은 의사, 전도 부인, 여성 운동가, 간호사, 미용사, 교육자, 노동 운동가, 기자, 작가, 항일 무장 투쟁 운동가로 변신했다. -p.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