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부 매뉴얼>
소설을 읽는 것은 수학 문제를 푸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러니까 쉬운 소설을 읽는 것은 1+1=2 같은 쉬운 문제를 푸는 것이고, 잘 쓰여진 훌륭하고 정교한 소설을 읽는 것은 복잡하고 정교한 수학 문제를 푸는 것과 비슷하다는 그런 생각.
사람들의 감정은 난해한 것 같지만 압축시키면 외려 간단해지기도 한다. 아주 어려운 수학 문제의 답안이 결국 숫자 몇 개로 끝나는 것처럼, 누군가의 대단히 복잡해 보이는 감정도 어쨌든 거르고 거르다 보면 그 최종적인 잔여물은 기쁨, 슬픔, 분노, 즐거움 등의 단어로 단순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인생의 진리(?) 역시 마찬가지여서, 살면서 경험하고 터득하게 되는 이치랄까, 교훈이랄까 하는 것들 대부분이 실은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속담이나 격언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종종 느끼곤 한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 거나, ‘사람 알고 보면 다 거기서 거기’ 라거나, ‘몸에 좋은 것은 괴롭다’ 거나, ‘뿌린 대로 거둔다’ 거나 뭐 기타 등등.
하지만 복잡한 수학 문제에서 숫자 몇 개를 도출하기까지 엄청난 풀이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처럼, 인생에 대해서도 앞서 언급한 얼핏 단순해 보이는 답을 도출하기까지 사실은 엄청난 풀이과정을 거쳐야만 하는 것이다.
직접 풀지 않고 해답지를 보고 답안을 베낀 수학 문제가 수학 실력 향상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처럼, 개인이 가진 서사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지 않은 채 듣게 되는 저러한 말들은 사실은 교훈으로서 아무런 기능을 할 수 없다. 인생에 대한 어떠한 가르침도, 인간에 대한 이해도.
물론 삶은 수학 문제와는 좀 다르다. 인생은 한 번뿐이고, 살면서 모든 것을 일일이 경험해보고 터득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그리고 여기에서 소설이 바로 그 ‘풀이과정’을 대신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모든 것을 일일이 겪어보지 않고도 알 수 있도록. 이해할 수 있도록. 대신 경험할 수 있도록. 깨달을 수 있도록.
인간의 납작하고 단순한 감정은 소설 속에서 서사라는 풀이과정을 거침으로써 대단히 아름답고 복잡하고 정교한 하나의 ‘이야기’로 변모한다. 하나하나 특별해진다. 입체성을 띄고 구체화된다. 잘 쓴 소설은 그렇게 아름다운 수학 문제처럼 인간의 복잡한 내면을 풀이해서 보여준다.
작년에 사놓고 내내 그냥 두었던 루시아 벌린의 <청소부 매뉴얼>을 이제야 읽었다. 사실 초반에는 문체 때문인지 번역 때문인지 스타일 때문인지 읽는 속도가 굉장히 더디었고 그래서 아무래도 오랫동안 방치하게 되었는데, 올해 두 번째 소설집이 출판되어서 그걸 주문한 김에 마음먹고 읽게 되었다. 초반에는 작년 첫 시도처럼 잘 읽히지 않았으나 탄력이 붙으니 아주 금방이었다. 읽는 내내 아주 훌륭하고 복잡하고 예술적인 수학 문제를 푸는 듯한 기분이었다.
칠레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3번의 결혼과 이혼을 거치고, 네 명의 아이를 낳고, 싱글맘으로서 그들을 건사하며, 그러는 사이 청소부, 전화 교환원, 병동의 사무원, 작가, 교사 등으로 일하고, 사는 내내 알코올 중독으로 고통받았던 작가는 생전에 76편의 단편소설을 발표했는데, 그 단편소설 속에 살면서 마주칠 수 있는 온갖 미묘한 감정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상황들, 차마 누구에게 털어놓기 어려운 부끄러운 사연들, 당혹스러운 이야기들이 들어 있다.
누구나 한두 번쯤 겪어봤으나 본인조차 알아차리기 어려운 세세한 감정의 결이 이야기마다 정교하고도 아름답게 드러난다. 출판사 소개글로는 숨겨져 있던 보석, 레이먼드 카버에 견줄만하다 어쩐다 하는데, 내 기준에서는 카버보다 훨씬 더 좋았다.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물론 이것은 내가 여성이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레이먼드 카버, 앨리스 먼로, 윌리엄 트레버 등의 단편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아마도 아주 좋아할 것이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