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엄마 생각을 자주 한다. 이렇게 자주 한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자주 한다. 물론 그전에도 몸이 아프거나, 애들을 맡겨야 하거나 하면 엄마를 생각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나 자신이 아쉽기 때문이었고 딱히 엄마의 안위를 걱정하거나 염려해서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최근에 싸이월드에서 20여 년 전의 엄마 사진을 보면서, 과거에 엄마가 얼마나 젊고 빛났는지를 이제와 새삼스레 느끼면서, 반대로 현재의 엄마가 얼마나 나이 들었는지를 실감하면서, 엄마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오히려 늘어났다. 엄마가 떠난 뒤의 삶에 대하여. 그 삶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에 대하여.
그래서 엄마로부터 연락이 없는 때에도 엄마에 대해 생각한다. 어디 아프지는 않은지, 건강한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런 걸 보면 아기 때 부모에게 매달리고 집착하던 인간은 한 차례 부모 곁을 떠났다가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다시금 돌아오는 것 같기도 하다. 부모가 떠날 날이 조금씩 가까워지는 것을 깨달으면서 말이다.
때로는 엄마가 거동을 못하게 되거나, 인지능력이 조금씩 떨어지거나 하는 상황에 대해 생각해보기도 한다. 물론 아직 60대이며 별다른 지병이 없는 엄마이기에 여전히 먼 훗날의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치매를 앓았던 외할머니와, 그런 할머니를 곁에서 지켜보던 엄마의 얼굴과, 그런 엄마를 뒤에서 바라보던 어느 날의 내가 떠오르는 날이면 마음이 아주 이상해지고는 한다.
생각은 흐르고 흘러 언젠가 엄마가 할머니의 위치에 놓이고, 내가 엄마의 위치에 놓이는 날이 온다면, 또는 내가 할머니의 위치에 놓이게 되는 날이 온다면, 그때 엄마는, 나는, 나의 아이들은 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더군다나 치매는 유전이라고도 하고. 나는 과연 나의 망각을 잘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때의 기분은 어떠할까. 내가 나라는 사실조차 잊어버리면 어쩌지.
엄마가 기억을 잃어가는 것도, 그런 엄마를 지켜보는 것도 두려운 일이지만 나 자신의 망각은 더더욱 무서운 일이다. 평생을 기억력과 활자에 의존해 살아온 사람이 언어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결국 두려움 때문에 상상은 대개 그 선에서 끝나고 마는 것이지만.
델핀 드 비강의 <고마운 마음>은 고맙게도 내가 무서워서 중단하고 말았던 ‘상상’을 구체화시켜준다. 평생을 텍스트에 의지하며 살던 사람이 그 텍스트를 서서히 잃어버리는 순간에 맞이하는 절망감, 머릿속이 하루하루 지워지는 순간의 공포, 그럼에도 끝끝내 포기할 수 없는 어떤 존엄, 생명의 불꽃이 사그라드는 와중에도 꼭 지키고 싶었던 어떤 가치,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이 점점 시들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주변인들의 심정 같은 것을 짧은 소설 안에 녹여냈다.
평생을 교정 교열자로 끊임없이 읽고 쓰며 살아온 주인공 미쉬카는 80대의 어느 날, 돌연 치매를 맞이하면서 요양원에서 생활하게 된다. 결혼도 하지 않고 자식도 낳지 않고 평생을 외롭게 살아온 그녀이지만 어릴 적부터 같은 건물에 살아 가족처럼 지내던 마리 덕분에 아주 외롭지는 않다. 마리는 매일같이 요양원을 찾아와 마치 친딸처럼, 아니 친딸 이상으로 그녀를 배려하고 보살핀다.
미쉬카에게 마음을 쓰는 사람은 또 있다. 매주 한 번씩 찾아오는 언어치료사 제롬은 천성적으로 연민을 타고난 사람이다. 그는 요양원에 있는 노인들을 볼 때마다 한때는 반짝반짝 빛나고 기지가 넘쳤을 그들의 젊은 모습과 현재를 겹쳐 보며 그 시듦과 쇠락을 슬퍼하고는 한다. 그는 미쉬카를 바라보며 깊은 슬픔을 느낀다. 미쉬카가 존엄을 잃지 않으려 애쓰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허무하게 무너지고, 그 사실이 제롬을 아프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상실과 노화의 슬픔이 이 소설의 주제는 아니다. 앞에서 줄줄이 무겁고 슬픈 이야기를 하긴 했지만 이 소설은 사실 슬픔보다는 본질적으로 기쁨 쪽에 맞추어져 있다. 희극이냐 비극이냐 하면 단연코 희극 쪽. 후반부로 가면서 독자는 인물들이 누군가에게 베풀었던 작은 마음이 또 다른 사람에게로 이어지는 어떤 ‘기적’ 같은 과정을 목격하게 된다.
위험을 무릅쓰고 유대인 소녀를 보호해준 어느 스위스 부부의 친절은 소녀에게 인간에 대한 애정을 남기고, 결국 그 소녀가 훗날 또 다른 학대 혹은 방임 가정의 소녀를 구해줄 수 있도록 만든다. 그리고 그 마음은 다시 먼 훗날 젊은 여성이 자신과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치매 노인을 돌보아주는 마음이 되게끔 한다. 그런 사소한 친절과 그 친절을 잊지 않는 ‘고마운’ 마음들이 이어져, 결국은 작은 기적을 만들어내게 된다.
나는 사실 대부분의 인간을 믿지 않는데, 뭐 인간 혐오라기보다는 인간 또한 동물의 일종이라고 한계를 명확히 긋는 편이다. 인간의 선의 또한 거의 믿지 않는다. 인간은 누구든 어느 순간이든 대개는 사적인 이익에 마음이 흔들리기 마련이고, 말이란 너무나도 가볍고 하찮은 것이며, 맹세나 신의나 절개나 우정이나 사랑 따위, 사실은 대단하지 않은 것이라고. 그렇다고 냉소나 멸시 까지는 아니지만 하여간 기대를 최대한 덜 하고 사는 편이다. 그 편이 정신건강에도 좋고, 그게 사실이라고 믿기도 하고.
그런데, 그렇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런 이야기를 보면 늘 울게 되는 것이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가질 수 있는 막연한 선의 같은 것을 목격할 때, 아무런 대가도 보상도 바라지 않고 그저 순수하게 친절을 베풀고 마음을 내줄 때, 그리고 그에 대해 받은 사람이 너무나도 고마워할 때, 그것을 마지막 순간까지 잊지 않으려고 할 때, 그것을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지키려 할 때, 그 마음이 너무나도 드물고 희귀한 동시에 한편으로는 아름다워서 매번 그렇게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자주 잊고 지내는 것 같다. 악의와 고통은 우리의 몸에 반드시 상흔을 남기지만, 그래서 사는 내내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들지만, 반대로 타인의 선의와 친절 같은 것도 우리의 몸에 같이 새겨진다는 것을. 그래서 삶의 순간순간마다 우리를 지켜준다는 것을.
그들을 처음 만날 때마다, 나는 같은 이미지를 찾는데, 그것은 바로 그들의 이전 모습이다. 마치 질 나쁜 수성 펜으로 덧씌운 그림에서, 원래의 스케치를 찾으려고 하는 것처럼, 흐릿한 시선, 명확하지 못한 행동, 구부정하거나 아예 허리가 몹시 굽은 실루엣 뒤편에서 그들의 모습이었던 젊은 남자 혹은 젊은 여인의 모습을 나는 찾는다. 그들을 관찰하고 나면, 혼잣말이 나온다. 그녀도, 그도 사랑했었겠지, 소리도 지르고, 즐기기도 하고, 물속에 들어가기도 했을 거고, 숨이 헐떡일 정도로 달리고, 계단 몇 개를 급히 올라가거나, 밤새 춤도 추었겠지. 그녀도, 그도 기차나 지하철을 탔을 테고, 시골길을 거닐거나, 산을 오르고, 포도주를 마시고, 늦잠을 자고, 끝도 없는 논쟁을 벌였겠지. 그런 생각이 나를 뒤흔든다. 나는 그런 이미지를 추적하고, 그 이미지를 복원하는 일을 멈출 수 없다. -p.48
“미안하구나. 선택은 네가 하는 거다. 그러면 너도 알게 되겠지. 어쨌든 이거 한 가지만 말하고 싶구나, 네가 결정을 하게 된 후에 말이야. 중요한 것은 바로 그거야, 가장 중요한 것은 그거라고.”
“뭐요?”
“사면서* 처음으로 다른 누군가를 관심을 가지고 보살폈어. 나 말고 다른 사람 말이야. 그게 모든 것을 바꾸더라, 알겠니, 마리야. 다른 사람 때문에 두려울 수 있어,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 때문에. 그래도 그건 정말 큰 행운이란다.” -p.89
*본래는 살면서 이겠으나, 치매에 걸려 단어를 자꾸 틀리는 미쉬카는 이를 사면서라고 잘못 발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