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빌라>
토야마에서 살던 집은 주택가 골목길의 아주 깊숙한 안쪽에 위치해 있었다. 10시에 카페 마감을 하고 이런저런 뒷정리를 하고 10시 40분쯤 마지막 전차를 타고 집 근처의 정류장에 내리면 11시쯤 되었는데, 시간이 시간인지라 음식점이나 세탁소 등도 모두 문을 닫은 상태였고, 불빛이라고는 골목 초입에 있는 가로등과 거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오도카니 서 있는 담배 자판기가 뿜어내는 하얀 빛이 다였다.
전차를 타고 있을 때만 하더라도 아무렇지 않았던 마음은 정류장에 내리는 순간부터 조금씩 가라앉다가 가로등 불빛을 마주하면서부터 걷잡을 수 없이 다운되고는 했다. 그러다 담배 자판기를 지나칠 무렵이면 그야말로 깜깜해지고. 그러면서 나는 자주 울고 싶어 졌다. 집에까지 이르는 얼마 안 되는 그 시간이 한없이 길게 느껴지는 한편, 끝도 없이 이어졌으면 하는 이상한 마음이 동시에 들기도 했다. 아무도 없는 캄캄한 집에 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아무도 없는 골목에 서서 자주 하던 나날이었다.
‘일본’을 생각하면 눈앞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이 저 캄캄한 골목길 풍경인 것은 조금은 놀라운 일이다. 일본에 살았던 길지 않은 기간 동안 좋은 일도 많았고 좋은 추억도 많았고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당시의 어떤 정서가 나에게 그만큼 깊은 영향을 미쳤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모두와 함께 있으면서도 혼자인 것만 같은, 다 같이 웃고 있지만 물 위에 뜬 기름처럼 둥둥 떠서 섞여들지 못하는 듯한, 어디에서도 나의 자리를 찾지 못하는 것 같은 그런 느낌들.
딱히 일본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마음이 가라앉을 때면 늘 저 깜깜한 풍경이 떠오르고는 한다. 담배 자판기의 불빛에 의지해 그 옆에 쭈그리고 앉아 무릎에 머리를 묻고 있었던, 어차피 골목에 있는 것이나 집에 있는 것이나 아무도 없는 것은 마찬가지인데도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던, 누군가 나를 발견해주기를 애타게 기다리면서도 결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 깨우치던 순간들.
올해는, 특히 올여름에는 이상하게도 저 풍경을 떠올리는 일이 많았다. 아마 모두에게 힘든 시절이었을 것이고, 나는 여러모로 사정이 많이 낫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래저래 다운되는 일이 많았던 시기였는데,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해가 환하게 비치는 한낮에조차 순간순간 눈 앞에 당시의 깜깜한 골목과 하얗게 빛나던 자판기가 떠오르고는 했다.
물론 그때로부터 20여 년 가까이 흐른 지금은 저때만큼 ‘울고 싶다’는 느낌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는다. 당시에는 친구도 가족도 없는 낯선 곳(사실 일본이 무슨 중동이나 남미만큼 먼 곳도 아니고 그리 낯선 나라는 아니지만)에 있기에 고독하고 외로워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사람이란 언제든 아무 이유 없이도 울고 싶어 질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고독하고 외로운 느낌 역시 주변에 누군가가 있는 것과의 여부와는 무관하게 느낄 수 있다는 것도 안다.
그것은 그냥 가슴이 쿵쿵 뛰는 것처럼 특정 조건 하에서 일어나는 신체의 자연스러운 반응 같은 것. 마치 높은 곳에 올라가면 어질어질하고 신체가 주변 사물보다 빠르게 움직이면 배가 간질간질해지는 것처럼, 사람이란 신체적 조건과 환경적 조건만 맞으면 어느 순간 이유 없이 울고 싶어 지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걸 아는 것과 그 느낌을 견디는 것은 또한 별개의 문제이기에, 긴 비가 오는 동안, 여러모로 안 좋은 소식이 들려오는 동안, 나는 자주 울고 싶었고, 그 마음을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자주 길을 잃곤 했다. 그리고 백수린의 <여름의 빌라>를 읽으면 그랬던 마음에 깊은 위로를 받았다.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은 다음과 같은 사람들을 위한 이야기이다.
자신을 이방인처럼 느껴본 적이 있는, 하지만 그 사실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애를 써 본 적이 있는 사람, 인생에 무언가를 기대하면 실망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번번이 기대하면서 다음의 실망을 대비하는 사람, 아름다운 장면을 보며 그 장면이 사라질 때의 슬픔을 상상하는 사람, 어떤 것을 너무 많이 사랑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몇 시간이고 도시를 걸어본 적이 있는 사람, 종종 과거의 어떤 순간을 떠올리며 후회하지만 돌아가더라도 같은 선택을 하리라는 것을 깨닫고 침잠하는 사람, 기본적으로는 고독하고 외롭고 울고 싶으나 끝끝내 울지 않으려 하는 사람.
이 소설집에 실린 모든 이야기들은 나의 과거이자 현재였고, 어쩌면 미래의 어느 장면 장면들이 될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읽으면서 많은 순간 울고 싶었지만 동시에 많은 위안이 되었다. 모든 작품이 좋았지만 <흑설탕 캔디>가 가장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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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주말에는 브리스의 친구들이, 다른 주말에는 브리스의 부모님이 커다란 꽃다발과 초콜릿, 알자스 지방의 와인이나 묑스테르 치즈 따위를 사가지고 집으로 놀러왔는데, 그들은 모두 좋은 시람들이었고 잡채나 불고기 같은 난생처음 맛보는 음식들을 모두 맛있게 먹었다. 하지만 그들이 나의 친구도 나의 부모도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일주일에 세 번씩 운동화를 신고 나가 파리를 걸었고, 이따금씩 길을 잃었다는 느낌에 사로잡히면 거리에 서서 조용히 울었다. -p.28, 시간의 궤적
같은 장소를 보고도 우리의 마음을 당긴 것이 이렇게 다른데, 우리가 그 이후 함께한 날들 동안 전혀 다른 감정들을 느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라요. 무無. 당신의 집 거실에 적혀 있던 글자처럼, 사실은 우리 사이에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음을 그저 받아들였으면 좋았을 텐데. 사람은 어째서 이토록 미욱해서 타인과 나 사이에 무언가가 존재하기를 번번이 기대하고 또 기대하는 걸까요. -p.56, 여름의 빌라
그럼에도 이런 겨울 오후에, 각설탕을 사탕처럼 입안에서 굴리면서 아무짝에 쓸모없는 각설탕 탑을 쌓는 일에 아이처럼 열중하는 늙은 남자의 정수리 위로 부드러운 햇살이 어른거리는 걸 보고 있노라면 할머니는 삶에 대한 갈망과 미래에 대한 기대가 또다시 차오르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
그런 상념에 빠져 있다보면 자연스럽게 지금은 브뤼니에 씨가 여기에 있고, 할머니는 그와의 사이에 무언가, 공감이라든지 이해, 생의 가장자리로 떠밀려온 사람들 사이의 연약한 연대나 우정 같은 것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지만, 브뤼니에 씨는 할머니와의 시간에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않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알겠는가? 그에겐 말이 통하는 다른 친구들이 있을 테고, 심지어 애인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p.199-200, 흑설탕 캔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