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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혜 Aug 27. 2020

티끌 같은 나

대학 졸업 즈음 취업이 지지리도 안될 때는 많이 후회했다. 왜 하필 취직에는 1도 도움이 안 되는 영문학 따위를 전공해서... 뭐 그런 생각을 하곤 했던 것이다. 심지어 복수전공은 일본문학. (내가 다닌 대학에는 일본문학과가 공식적으로는 없으나 관련 전공과 교양과목들은 존재했기에 필수학점을 이수하면 ‘연계전공’이라는 이름 하에 학위를 취득할 수 있었다... 는 아무도 관심 없는 TMI.)

어쨌든, 그 덕분이라고 하기는 뭐해도 지금 이렇게 책을 읽고 글을 쓰고 하고 있는 것을 보면 또 인생이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다시 돌아가도 또 문학을 택할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쉽게 하는 말이지만. 단, 그때처럼 영문학이나 일본문학은 말고 이번에는 다른 것을 공부해보고 싶다. 예를 들면 러시아 문학이라든지. 물론 영문학도 일본 문학도 여전히 좋아하지만, 간혹 읽게 되는 러시아 소설들이 너무 너무 재미있어서 깜짝 놀라곤 한다.

어차피 알고 있는 러시아 작가라고 해봤자 남들처럼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나 체호프 정도가 다 이긴 하나, 그들의 작품을 통해 느껴지는 러시아 문학과 러시아인들의 사고방식에 깊은 매력을 느낀다. 영문학에 셰익스피어만 있는 것이 아니듯이, 러시아 문학에 있는 더 많은 다양한 작가를 알고 싶고 읽고 싶다. 현대 작가들을 포함해서.

이번에 읽은 빅토리아 토카레바 역시 아주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된 러시아 작가인데, 다소간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펼쳤다가 며칠간 정신없이 빠져들어서 읽었다. 빅토리아 토카레바는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하나 러시아에서는 이미 널리 알려진 작가라 한다. 또한 여러 유명한 상도 받고 칸영화제에서 공로상도 받았을 정도로 대중적 인기와 예술적 성과를 인정받았다고. 1937년생이므로 앞서 언급한 러시아 작가들보다는 한 세대 뒤의 사람이다. 직접 읽어보니 그야말로 체호프의 여성 버전이란 설명에 딱 맞는 느낌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흔히 우리나라에 잘 알려진 레이먼드 카버나 앨리스 먼로를 두고 체호프에 많이 비견하고는 한다. 그만큼 문장이 간결하면서 임팩트가 있다는 의미로 하는 말일 텐데, 나로서는 한 번도 거기 동의해본 적이 없었다. 일단 먼로나 카버에게는 체호프 특유의 유머감각이 없다. 물론 둘 다 훌륭한 작가이고, 좋아하는 작가이며, 유머감각 또한 갖추었지만, 그럼에도 둘의 유머는 체호프와는 다르다.

이번에 빅토리아 토카레바를 읽으며 느꼈다. 아 그 유머감각은 러시아인일 때만 가능한 것이구나. 무자비하고, 거침없고, 잔인할 정도로 솔직하면서, 일체의 가식도 없이 있는 그대로 직진하는 스타일의 유머.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침실에 있는 회장의 사진을 보니 젊은데 몸이 옷장처럼 사각형이었다. 하긴 그렇게 똑똑하고 돈 많은 사람은 사각형이어도 된다.” -p.272, 이유

“엘리베이터 옆에는 작곡가의 아내가 크고 둥근 카라가 달린 예쁜 흰색 상의를 입고 서 있었다. 목이 짧다기보다 없는 거나 다름없어서 머리가 카라에 바로 붙어 있었는데, 접시에 수박을 놓아둔 모습과 흡사했다.” -p.408, 남이 우리랑 무슨 상관이죠

“옷장처럼 사각형”, “접시에 수박을 놓아둔 모습” , “네모난 얼굴 때문에 꽃게 같았다” 등등. 정말이지, 사람에게 쓰기에는 무자비할 정도로 솔직하면서 한편으로는 기존에 들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기발한, 동시에 너무나도 적절하고 정확한 표현들이라 읽으면서 빵빵 터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줄거리도 재미있지만 읽다 보면 문장들이 너무 웃겨서 계속해서 웃게 된다. 물론 이런 유머가 취향에 맞는다는 전제 하에.

<티끌 같은 나>는 이런 빅토리아 토카레바의 중단편 선집으로 총 5개의 작품이 실려있는데 모두 재미있다. 사실 줄거리 자체는 따지고 보면 그리 특별할 것은 없다. 전부 ‘평범한’ 여성의 인생의 흥망성쇠를 다룬다. 시대적 배경이 배경이다 보니 격동하는 러시아 사회에서 가난한 시골 출신의 미혼 여성이 도시에 올라와 좌충우돌하며 성공과 좌절을 반복해서 겪으며 사랑에서도 배신을 하고 배신을 당하는 류의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특히나 표제작인 <티끌 같은 나>의 경우 그 줄거리는 한국 아침 드라마와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시골의 가난한 집안 출신의 안젤라는 가진 것은 없으나 반반한 얼굴의 미혼 여성이다. 그녀는 어머니가 이웃에게 빌린 돈을 바탕으로 가수가 되기 위해 모스크바로 상경하지만, 가수가 되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금전적 뒷받침이 필요하단 것을 알고 좌절한 뒤 이 사람 저 사람 집을 전전하며 가정부로 일하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우연히 부유한 중년 남성과 내연 관계를 맺게 되고, 그의 도움으로 연예계에 데뷔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자신이 출연한 영화의 감독과 눈이 맞아 중년 남성을 배신하게 된다. 그리고 그 귀결 또한....

이런 식으로 배신하고, 배신당하고, 성공하고, 실패하고, 좌절하고, 버리고, 버려지고, 돈을 벌었다가, 잃었다가 하는, 뭐 그런 여기저기에서 흔하게 보고 들을 수 있는 막장 이야기인 것이다. 다만 이 ‘흔한’ 이야기들이 인상적인 지점은 앞서도 언급했다시피 매우 유쾌하고 신랄한 작가의 문체에 더불어 어떤 사건에도 의연하고 꿋꿋한 주인공들의 태도에 있다고 해야겠다. 주인공들은 어떠한 불행이나 놀라운 사건도 꿋꿋하게 견뎌낸다.

그렇다고 삶의 모든 비극을 태연하다거나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인다거나 되도 않는 무한긍정으로 정신승리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자신을 배신하고 도망간 남자를 보면서도 삶이란 원래 이런 거지, 인생이란 원래 그런 거지, 하면서 의연하고 씩씩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들 모두가 마지막 장면에서 그토록 고독해 보이면서도 아름다웠던 이유는.

격동기의 러시아의 생활상이 잘 드러나 있어 러시아 역사나 문화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특히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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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게이는 아내에게 사랑밖에 줄 게 없었다. 반면 레나는 사랑 빼고 모든 걸 다 가졌다. 결과적으로 어떤가? 사랑 없는 부와 명예는 무의미하다. 사랑이라는 빛으로 비추지 않는 삶은 추위와 어둠 속에서 동요하는 잠수함과 다를 게 없다. -p.140, 티끌 같은 나

슬픔이 피 속에 아드레날린을 주입하자 행복이 그것을 잘게 쪼개서 몸 밖으로 배출한 것인지도 모른다. 더욱이 사람은 본능적으로 사랑을 통해 슬픔을 치료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행복과 슬픔은 양날의 칼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둘이 합쳐서 하나의 몸을 이룬다. -p.199,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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