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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혜 Nov 11. 2018

쏟아지는 비를 함께 맞는 사람들에 관하여

<아픔이 길이 되려면>을 읽고

흡연이 폐암의 원인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다. 그럼에도 흡연자 대다수가 흡연을 지속한다. 미래에 발생할 폐암보다는 현재 닥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것이 다급하니까. 그렇다면 폐암의 원인을 단순히 흡연이라고만 이야기할 수 있을까. 흡연을 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은 그냥 넘겨버려도 되는 것일까.

김승섭의 <아픔이 길이 되려면>을 읽었다. 이 책은 ‘원인의 원인’에 대해 생각해보기 위한 책이다. 왜 특정한 직업군의 사람이 더 질병에 취약한지, 왜 성소수자나 트랜스젠더의 자살율이 더 높은지, 왜 따돌림의 상처나 가난의 경험이 한 사람의 건강과 생애에 그토록 큰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하여.

책에 나온 여러 사례를 접하다보면 우리 나라가 차별이나 낙인과 같은 사회 구조적인 문제에 굉장히 취약하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더구나 이 책은 그러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으므로 다소 침울해지기도. 다만 ‘악에서 스스로를 구하기 위하여’ 평생 분투하는, 이러한 책을 쓰고 읽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또 그렇게까지 암울하지만은 않다는 어떤 희망이 생기기도 한다. 온갖 사악함으로 가득한 것 같은 이 세상에는 “쏟아지는 비를 멈추게 할 수 없어 함께 비를 맞으려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또한 읽으면서 한 사람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 역시 질병과 마찬가지 기제로 작동한다는 생각을 했다. 질병 그 자체는 비록 바이러스로부터 비롯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수많은 사회 구조적인 문제가 촘촘히 얽혀있듯이, 인간의 모든 행동 역시 그 이면에는 그렇게 되기까지의 배경과 역사가 있는 것이다.

흔히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의 행동에 대하여 저 사람은 왜 저토록 공격성이 높을까, 저 사람은 왜 저렇게 합리적이지 못할까, 저 사람은 왜 저토록 자존감이 부족할까, 저이는 왜 저토록 나약한가, 왜 저 사람은 나쁜 선택을 반복해서 하는가 하는 의문을 품고, 그러면서 때로는 분노하거나 한심해하기도 하였는데, 사실은 그러한 모든 요소에도 사회적인 환경이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즉 현재의 내가 타인에게 관대할 수 있고, 합리적으로 사고할 수 있고, 최소한의 자존감을 유지할 수 있고,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고, 불합리한 상황에 분노하고 약자를 생각할 수 있는 것 또한, 사실은 내가 운좋게도 그럴 수 있는 여유가 있고 그럴만한 환경에 놓여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한국 사회의 온갖 모순들이 집약된 구조적 폭력에서 기인한 트라우마를, 개인적인 수준에서 진단하게 되고 그것이 개인적 수준의 치료’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게 아닌가 우려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중략)
고통은 근본적으로 개인적인 것입니다. 타인의 고통을 나눈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고통이 사회구조적 폭력에서 기인했을 때, 공동체는 그 고통의 원인을 해부하고 사회적 고통을 사회적으로 치유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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