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승혜 Nov 16. 2018

아무말 대잔치 속 한떨기 진지함

<낭만주의>를 읽고

박형서의 <낭만주의>를 읽었다. 총 6개의 단편이 실려있는 소설집이다. 박형서의 책은 <핸드메이드 픽션> 이후 두번째인데, 읽고 나서 뭘 읽은건지 어안이 벙벙하게 만드는 것이 특징인 것 같다. 누가 재밌냐고 물어보면 도저히 설명을 해줄 방법이 없다. 그렇다고 재미가 없느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고. 그냥 사고의 흐름이 미친 수준이라서 일반적인 형태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예를 들자면 두번째로 수록된 <권태>라는 단편은 미국에서 난 큰 불과 한국에서 티비를 통해 그 소식을 바라보는 어떤 여성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 불은 사실 누군가가 꿈 속에서 던진 담배꽁초에서 우연히 시작되어 실제 화재로 번진 것으로, 알고보니 그 누군가가 한국에 사는 바로 그 여성이었다!!!! 뭐 이런 식인 것. 심지어 그렇게 시작된 불은 이후 몇십년간 지속되면서 미국을 거의 다 태워버린다. 이 시공간을 뛰어넘는 미친 상상력에는 어떤 개연성도 부연설명도 없다. 반면에 불이 번지고 그것을 진압하는 과정은 불필요할만큼 상세하게 그려지기도 한다.

이전의 많은 작품들에서도 실험이나 연구 관련 디테일이 상당히 자세하게 그려지는 것으로 보아, 작가가 과학계에 평소부터 관심이 많은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용은 아무말인데 용어 및 디테일은 전공생의 논문에 필적한다. 마지막의 <거기 있나요>란 작품에서도 실험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약 빨고 썼다”는 말 외에는 설명할 방도가 없는 대목이 참으로 많았다. 마치 사람처럼 반항을 하기도 하고 복종하기도 하는 입자들을 지배하면서 실험을 조작하는 연구원이 주인공이다.

가장 처음 수록된 <개기일식>이라는 단편은 이런 그의 스타일을 잘 설명해주는 작품으로, 교수에게 줄거리의 개연성이 없다고 질타를 듣는 문창과(혹은 국문과) 학생의 이야기이다. 작품 속에서 주인공은 “왜곡이야말로 이야기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개연성은 개나 줘버린 듯한 아무말로 가득 찬 소설집인데 다 읽고 나면 마음 속에 어떤 여운을 남긴다는 것이 참으로 희한하다. 아마도 아무말 속에 고이고이 숨겨져있던 어떤 진지함과 진의가 문득문득 튀어나오기 때문이겠지만.

“성범수의 생각은 달랐다. 이야기가 왜 존재하는가?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슬픈 쪽으로든 즐거운 쪽으로든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놓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야기가 사랑받는 것이고, 사랑받기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니 사건이란 그럴듯하기보다는 흥미로워야 한다. 이야말로 이야기의 영속적인 본성이기에, 성밤수는 무엇보다도 흥미로움을 모색하는 방식으로 근본에 충실하고자 했다. 그러한 자세가 누군가에게는 경박한 장난으로 보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성범수는 장난치지 않았다.” -p.23-24

“만남과 헤어짐을 겪을 때마다 누구나 조금씩 멸망해간다. 설령 아무리 짧더라도, 설령 그것이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p.217

매거진의 이전글 여러분, 세상은 키보드 ‘안’에 있어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