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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혜 Dec 18. 2018

주인공 없는 이야기

<피프티 피플>을 읽고

정세랑의 <피프티 피플>을 읽었다. 장편이라고는 하지만 소설집에 더 가까운 느낌으로, 제목과 같이 50명의 인물의 이야기를 다룬 옴니버스 소설이다. 각 인물의 이름을 제목으로 붙인 4-7 페이지 내외의 짧은 장들로 이루어져있으며 중심 줄거리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 굳이 따지자면 지역적인 공통점 정도.

어느 외곽지역에 위치한 종합병원을 중심으로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 간호사, 직원, 환자, 환자의 보호자, 환자의 보호자의 친구, 환자의 친구, 병원 인근 상점의 주인 등 여러 인물이 등장한다. 저마다 사연을 지니고 있는데 말 그대로 심각한 ‘사연’일 때도 있고, 그냥 즐겁고 신나는 행복한 이야기일 때도 있다. 각각의 인물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경우도 있지만 그냥 스쳐 지나가기도 한다. 완벽한 타인인 상태로.

그러고보니 나도 한두번 정도 그런 생각을 해봤던 적이 있는 것 같다. 드라마에서, 영화에서, 잠깐 얼굴이 스쳐 지나가고 그대로 퇴장해버리는 인물들을 보면서,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냥 저렇게 스쳐지나서 어디로 갈까, 하는 생각을. <피프티 피플>은 누구나 한번쯤 해봤을 법한 그런 의문을 해소해주는 소설이다. 50명 모두가 각자의 인생에서는 주인공인 동시에 타인에게는 그저 스쳐지나가는, 멀리 있는, 건너편 건물 옥상에서 손을 흔드는, 낯선 이에 불과하므로. 어떤 면에서 마치 페이스북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겉으로는 하하호호 웃고 맛있는 것을 먹고 즐겁게 지내는 듯한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십자가들, 사연들, 각자의 인생의 무게, 숨겨진 이야기들.

초반부는 흥미롭고 개별 인물들 역시 사랑스럽지만아무리 흥미로운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50명의 사연을 하나하나 듣다보면 아무래도 좀 지루해지는 감이 있다. 그러하다보니 하루에 몇편씩 띄엄띄엄 읽느라 다 읽기까지 다소 시일이 좀 걸렸다. 물론 각 편이 화장실에 잠깐 앉은 사이에도 읽을 수 있을만큼 짧아서 좋았던 점도 있고. 나오는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은지 어떤 장에서 등장한 인물을 보면서, 어! 이 사람 분명 어디 나왔는데, 하면서도 어딘지 기억을 못하겠단 말이지. 후반부의 몇 편은 지나치게 사회적 이슈를 다루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여서 다소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전체적인 수준은 상당히 높다. 50명의 삶을 상상하는 자체가 엄청난 성실함과 끈기, 노력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느낀 것인데 최근의 젊은 여성 작가들은 조금씩 결은 다르지만 문장이 대체로 비슷비슷하다는 느낌이 든다. 정세랑, 최은영, 김애란, 김혜진, 최진영, 서유미, 박민정. 다들 문장이 깔끔하고 글을 매우 잘 쓴다. 하지만 모두 엇비슷한 느낌이 드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름을 가리고 문장만 놓고 보았을 때 구분하기가 쉽지 않을 듯 하다. 뚜렷한 개성이 없다는 것은 아마도 작가로서 어떤 한계가 되지는 않을런지. 정세랑 작가는 최은영이나 김애란과 비슷한 결을 유지하면서도 조금 더 유쾌한 느낌이 있다. 올해 그녀의 장편(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짧지만)인 <보건교사 안은영>을 재미있게 읽었다.

“나중에 하나도 기억 못하겠지? 니가 자기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의진은 저도 모르게 그런 말을 했다. 우리가, 한사람 한사람이 기억하지 못하는 사랑의 기간들이 얼마나 길까. 갑자기 그런 생각을 했더니 눈물이 조금 고였다. -p.141

가장 경멸하는 것도 사람, 가장 사랑하는 것도 사람. 그 괴리 안에서 평생 살아갈 것이다. -p.266


앞으로는 별점도 같이 붙여야지. 이건 ⭐️⭐️⭐️ <참고> 별 다섯 - 강력 추천,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음.


별 넷 - 추천, 잘 읽히고 재밌음.


별 셋 - 무난함.


별 둘 - 굳이 읽겠다면 말리지는 않겠음.


별 하나 - 책읽고 열받고 싶은 사람에게 권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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