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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혜 Dec 17. 2018

이토록 리얼한 불륜

<나의 사랑, 매기>를 읽고

올 여름 <경애의 마음>을 인상깊게 읽었던 터라 - 무려 올해의 책 중 1권으로 꼽기까지 - 두어달 전에 김금희 작가의 신작 <나는 그것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가 나오자마자 구매했다. 물론 빌려온 책에 밀려 아직 읽진 못했지만. 거실 한 구석에 놓아둔 채로 그저 째려보고만 있었는데 이럴수가, 그새 김금희 작가의 신작이 또 나온 것이다! 제목은 <나의 사랑, 매기>. 일년에 단행본을 세권씩 내다니 정말 엄청나다. 참으로 성실하고 부지런한 작가다.

대학시절 잠깐 사귀었던 재훈과 매기(가명)는 우연한 계기로 다시 만난 뒤 연인사이가 된다. 어릴 적에는 연극을 했지만 지금은 재연 프로그램(아마도 서프라이즈로 추정)의 배우로 출연 중인 매기는 남편 및 두 아이와 제주도에서 생활하며, 촬영이 있을 때만 홀로 서울을 다녀간다. 이십여년만에 다시 시작된 그들의 사랑은 결코 낭만적이지 않다. 사람들 눈을 피해 모텔 혹은 재훈의 방을 전전하며 기껏해야 치킨과 순대국을 먹다가 헤어지는 그런 관계다. 대학시절과 마찬가지로 재훈 쪽이 늘 조금 더 애닯다. 어느덧 현실에 불만을 품고 닥달하는 재훈과 늘 심드렁한 매기 사이에서 둘의 관계는 점차 위태로워진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 애달프고 안타깝고 그런 거 전혀 없다. 이렇게 리얼하고 웃긴 불륜 이야기는 처음이었다. 서사 자체는 뭐 남녀가 만나서 사귀다 헤어지는 그런 평범한 것이지만 김금희 작가의 깨알같은 유머가 수시로 튀어나온다. 그녀의 유머를 정말이지 너무 사랑한다. 무심한듯 다정하고 쓸쓸하면서 웃기는. 단순한 이야기지만 너무 재미있었다.

그나저나 현대문학 핀 시리즈는 양심 탑재 좀. 해설 제외하고 120페이지 짜리 소설을, 그것도 사이즈 엄청 작은 책을 장편이랍시고 11800원씩 받아간다니. 아무리 요즘에 이렇게 휘리릭 읽히는 소설이 선호된다고는 해도 단편소설을 장편처럼 판매하는 것은 좀 그렇지 않나 싶다. 작가의 말에 나오는 “우리는 이렇게 아무것도 예상치 못한 채 살아가지만 그렇게 해서 조금씩 아는 사람이 되어 간다고 믿는다.”란 문장이 마음에 남는다.

매기의 룰에는 밤에는 연락하지 않고 주말에도 연락하지 않는다, 가 있었다. 아이에게 동화책을 읽어주거나 신작 영화를 IPTV로 가족들끼리 보거나 한라산으로 캠핑을 가야 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짐작했다. 그 외에는 전화번호를 실명으로 저장해놓지 않으며 SNS에 우리 관계를 암시하거나 유추할 만한 감정의 찌꺼기들을 적지 않는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가 있었다. -p.33-34

“왜, 야, 맛 없니? 우리한텐 이런 음식이 딱이야. 우린 그냥 이런 거 먹고 미사리에서 데이트하고 모텔에서 대실해서 자고 그러는 거야. 원래 내연 관계는 그런 거야.” -p.41

“이거?”
조장이 손목을 보여주었다. 문신은 마치 닳듯이 - 햇빛이나 물기 같은 것이겠지만 - 무언가에 닳아 있어서 꽤 오래된 것처럼 보였다.
“안 돼, 라고 말해주는 거야.”
“누구한테요?”

우리는 이후에도 여러 번, 그때 조장이 했던 대답에 대해 얘기했는데, 매기와 나의 기억이 서로 달랐다. 나는 그 엑스 자 문신이 상대에게 안 돼, 라고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기억했지만, 매기는 자기 자신에게 안 돼, 라고 하기 위한 것이라고 기억했다. 내가 그런 건 좀 이상하지 않느냐고, 그냥 혼자 안 돼, 라고 생각하면 될 것을 그렇게 문신까지 하겠느냐고 주장했지만 매기는 아니야, 당연해, 라고 했다. 그렇게 눈으로 자신에게 보여주면서 되뇌어야 할 일도 있으니까.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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