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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승혁 Apr 05. 2016

난생처음 '스타벅스' 가본 날

카라멜마끼아또│혀끝으로 느끼는 부익부 빈익빈의 달콤 쌉싸래한 맛


본 글은 2013년 4월 11일 오후 12시 50분  서울 방배역 투썸플레이스에서 작성한 글을 옮긴 것입니다



늘 그렇지만 무언가를 써야 한다는 느낌만 들지 정확히 무엇을 써야 할지는 모르겠다. 한 껏 코를 간질이고 나오지 않는 재채기 같다. 마땅히 갈 곳이 없어 아메리카노를 하나 주문해 놓고 이곳에 앉아있다. 본래 토익 듣기를 공부하기로 했지만 내키지 않아서 책을 읽었다. 카페의 열린 문으로 여러 사람이 드나들고 찬 공기가 무릎을 시리게 했지만 꽤 집중해서 페이지를 넘겼다.



저녁에 있는 과외가 이따금씩 생각났다. 가기 싫다가도 열심히 해야겠다는 마음이 교차한다. 손바닥 뒤집듯이 오락가락하는 마음이 모순적이지만 모순이 그 자체로 원리라 언급한 헤겔을 생각하며 그러려니 넘어간다. 주차문제로 종업원과 간단하게 시비하는 아저씨가 앞에 있다. 카페란 곳은 도시에서 일어날 수 있는 거의 모든 사건이 잠재되어 있는 곳 같다. 차양 밖으로 빛이 하얗게 밝아 노트북의 모니터의 밝기를 높인다. 와인색 차양이 너무 붉어서 핏빛 같다는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키보드를 의식의 흐름대로 두드리는 내가 우습게 느껴진다.

 

방배역 스타벅스. 다음로드뷰


방배역 사거리에 처음 카페가 생긴 것은 내 기억에 2004년이다



이 진술은 순전히 내 기억에 의존한 것으로 사실과 다를 수 있다. 아무튼 나는 우중충한 검정 교복을 아무렇게나 입고 다니던 시절 처음 커피전문점을 보았다.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고 그곳에서 무얼 파는지 관심도 없었다. 더욱 정확히 기억을 표현하자면 2005년에 커피전문점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고, 인지한 순간 커피전문점이란 공간이 작년부터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조금 복잡하지만 기억이란 늘 그렇게 본 순간과 기억된 순간과 상기된 순간 사이에서 미묘하게 움직이지 않는가. 물론 나는 타인의 뇌를 가져본 적 없으니 쉽게 일반화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내 기억 회로는 그렇게 작동한다.

 

방배역 사거리에 생긴 그 카페에 나는 가볼 일이 전혀 없었다. 발음하기도 기억하기도 힘든 상호(스타... 뭐?.. 벅스??... 스타크레프트 아냐?)는 머리에 남지 않았다. 그저 나는 사거리에 자리 잡은 PC방이나 다니고 근처 맥도널드에서 감자튀김을 먹는데 힘썼다.

그때 까지만 해도 어른들 사이에서도 블랙커피 마시는 사람은 상대하지 말라는 농담이 돌 던 때였다. 사람들에게 커피는 밀크와 블랙 두 종류였고 아메리카노니 라떼니 하는 말들은 허영 조차도 넘어선 미개척의 처녀 단어일 뿐이었다. 휴대전화 벨소리가 64화음이란 사실이 세간의 주목을 사던 시절이었다. 노무현이 탄핵을 당했고 열린우리당이 그 해 총선에서 승리했다.


 


나는 EBS를 기억한

밀크와 블랙을 넘어선 최초의 커피를 나는 EBS를 통해 보았다. 지금까지도 사용하는 오래된 까만 돌 식탁 위에서 무언가를 먹고 있는데 EBS에서 커피 강좌가 나왔다. 아마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봤을 것이다. TV 속에는 멋진 요리사가 육중한 커피 머신을 다루고 있었다. 믹스로 저어 먹는 커피를 만드는데 무슨 저런 기계가 필요한가 싶어 신기하게 바라봤다.

은색의 반짝거리는 머신에는 많은 버튼이 달려있었고 이상한 컵이 매달려 있었으며 작은 호스가 여러 개 붙어있었다. 요리사는 간장 종지만 한 작은 컵에 새카만 커피를 받아냈다. 그는 여러 주의사항을 시청자들에게 일러주면서 커피에 우유를 섞고 거품을 내는 등 각종 재주를 부렸다. 색이 부드러운 커피 위로 휘핑크림을 올리고 드리즐이 뿌려졌다.

커피를 타 먹지 않고 요리하는 장면을 처음 봤기에 나는 그것이 신기했 다. 그리고 먹고 싶었다. (마시고 싶은 것이 아니라 먹고 싶었다)


요리 후 그가 일러준 커피 이름을 나는 단단히 기억해 뒀다. 언젠가는 꼭 먹어보기로 결심하며 괴상하기 짝이 없는 생경한 발음을 혀로 굴리며 외웠다. 캐러멜 마끼아또. 캐러멜 마키아토. 엄청 비싸 보인다는 생각을 하며 그 이름을 저장했다.


고등학생 땐 이게 제일 비싼 커피인줄 알았다


아무렇게나 헝클어진 머리로 동네를 쏘다니는 고등학생이 캐러멜 마끼아또를 먹을 수 있는 일은 좀처럼 생기지 않았다.

사실 EBS와 함께한 경이로운 시간이 지난 후로 나는 커피 따위는 잊어버리고 있었다. 고2였던 나는 고3이 되었고 커피 같은 곁가지 생각을 하느니 영어단어를 하나라도 더 외워야 했다. 나는 늘 책을 봤고 무언가를 외웠으며 틈이 나면 인터넷 강의를 들었다. 아이들은 연예인 대신 유명 수능 강사 이야기를 입에 담고 살았다.

팍팍하다 못해 기형적인 고3의 삶은 캐러멜 마끼아또와는 접점이 없었다. 물론 커피를 안 마신 것은 아니다. 잠을 쫓기 위해 수학학원에 갈 때면 매일 레쓰비를 마셨다. 파란색 캔에 든 3개 1000원짜리 레쓰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레쓰비를 손에 쥐고 학원에 오는 나를 아이들은 '레쓰비'라고 불렀다. 이수역 14번 출구 주유소 옆 학원에는 나는 레쓰비가 되어갔고 그마저도 나는 달달하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바리에이션 커피는 비주얼이 좋다


캐러멜 마끼아또는 기습적으로 나타났다.


여름은 지났고 가을에서 겨울 사이의 어느 시간으로 기억한다. 나는 개성 없는 교복을 입고 보이는 모든 것을 암기하고 있을 때였다. 아마도 그때의 나는 몇 개 대학의 수시에서 떨어졌을 것이다. 싱숭생숭한 나는 도곡동에 사는 부유한 친구와 함께 학교 주변을 정처 없이 쏘다녔다. 산책로를 걷고 청권사 앞 언덕을 올라 늘 그렇듯 방배역 사거리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여름 온기가 식었기에 바람은 찼고 빛바랜 낙엽은 힘 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세상 전체의 채도가 낮았다. 적당히 시간을 때우고 집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커피나 마시자. 친구의 그런 말이 처음이었다. 아무 마트나 들어가려는데 친구가 스타벅스에 가자고 했다. 스타벅스? 그런 단어는 생소했다. 아무튼 친구를 따라 방배역 사거리에 도착했다. 한국투자증권이 없어진 자리에 들어선 카페 이름이 스타벅스였다. 오며 가며 무덤덤하게 바라만 봤지 그곳이 뭐하는 곳인 줄도 모르고 있었다.


초록색 로고가 이국적인 그 카페로 우중충한 교복을 입고 들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향기가 나를 압도했다. 믹스커피와는 전혀 다른 진중하고 쌉쌀한 냄새가 카페 전체에 감돌았다. 약간은 탄 듯한 짙은 향 뒤로 어마어마하게 놀라운 메뉴판이 눈에 띄었다. 무려 커피값에 '0'이 세 개씩 붙어있는 것이었다. 300원짜리 레쓰비도 자판기 커피보다 3배 비싸기에 사치스럽다고 느꼈던 내게 커피값 5000원은 신세계였다. 그런 커피를 마시는 것 자체가 대역죄를 짓는 기분이랄까. 세련된 분위기에 안락한 소파가 비치된 카페에서 사람들은 무얼 할까 싶었다.


이렇게 만든 덴다


그런데 그곳에서 마주쳤다. 메뉴판에서 캐러멜 마끼아또란 글씨를 발견한 것이었다. 난생처음으로 캐러멜 마끼아또란 단어가 인쇄된 것을 보았다. TV 속에서 봤던 커피 요리가 떠올랐다. 요리사가 무수한 첨가물을 넣던, 주의사항도 그렇게 많던, 그 요리가 스타벅스에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최초의 캐러멜 마끼아또를 경험했다. 매우 달았고 오묘한 맛이라고 생각했다. 휘핑크림이 맛있었고 부드러웠다. 레쓰비가 단순한 맛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레쓰비의 인생을 사는 동안 친구는 마끼아또의 삶을 살았단 사실이 신기했다. 저마다의 삶이 다 다른 당도를 갖고 있다는 느낌은 낯설었다. 모두가 같이 밀크커피나 레쓰비를 나눠먹는 줄 알았는데 누군가는 마끼아또를 마시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300원과 5000원의 삶은 향부터 맛까지 달랐다. 기계가 만지는 커피가 있는가 하면 전문가가 요리하는 커피도 있었다. 다르다는 사실, 아주 많이 다르다는 사실은 이후 내 사고 회로의 무언가를 바꾸어 놓았다. 나는 커피값에 '0'을 세 개나 붙이는 그 황당무계한 기개가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정말 아름다운 세계였다. 0만 충분하다면 세상을 마끼아또와 안락한 소파로 채울 수 있었다. 0의 위력, 0에 대한 세계의 경배를 처음 마주한 날이었다. 마끼아또. 비싼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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