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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승혁 Apr 10. 2016

구겨진 휴일의 불안과 초조

불안 초조한 도시 사람에게 추천하는 '뉴욕 미스터리' 소설 단편선

신문기자


잔뜩 구겨진 신문 뭉치가 두개골 속에서 바스락 거린다. 맞비빈 부싯돌에 불이 붙듯 번쩍 찌릿한 통증이 후두부를 스친다. 머릿속에 짙은 안개가 낀 듯 흐리멍덩한 의식이 몽롱하기만 하다. 주방까지 겨우 걸어나가 미지근한 물을 한 컵 마시는데 벌써 대낮이다. 휴일이 벌써 반이나 지났다. 등받이가 네모반듯한 검정 의자에 앉아 발코니 밖을 내다본다. 빽빽한 침엽수 뒤로 벚나무가 서너 개 보인다. 그러니까 벌써 휴일이 절반이나 끝난 것이었다.

이를 앙다물고 고개를 뒤로 젖혀봤다. 꿀꺽. 침 넘어가는 소리가 지진처럼 달팽이관을 휘감아 돈다. 하얀색 타이레놀 두 알을 마저 삼킨다. 지금 일기랍시고 끼적이는 문장이 과거였다가 현재였다가 시제가 제 맘대로 라 불쾌했다. 잠시 백스페이스를 눌러 어말어미를 지우다가 그냥 그대로 가기로 한다. 오늘이든 내일이든 현재든 과거든 사실 별 차이가 없었다. 어제가 내일 같았고 내일은 오늘 같을 터였다.



휴일에 가장 무서운 일은 전화기를 켜는 것이다.

아무 일 없어도 전화기만 보면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 모두 아는 일을 나 혼자 놓쳤을까 봐 시시각각 불안해졌다. 전화기가 몸을 부르르 떨면 속보가 떴나, 긴급 기자회견이 열리나, 손톱을 초조하게 매만졌다. 습관은 이성을 가볍게 제압하기에 오늘이 아무리 쉬는 날이라고 되뇌어봐도 소용이 없었다. 문자메시지가 오면 놀라고 카카오톡이 오면 불안해졌다. 정작 스마트폰을 켜보면 시답잖은 농담이 대부분이었지만 혹시 모르는 일말의 가능성 때문에 마음은 항상 불안을 준비했다. 불안하다가 불안이 현실로 오면 단지 불안할 뿐이지만, 마음 편히 있다가 급작스레 일이 생기면 이마에 핏줄이 곤두섰다.



얇은 셔츠 하나 걸치고 집 밖으로 나가 차가운 커피 한 잔 마신다.

나이가 들수록 옛날에 이상하게 봤던 나이 든 사람의 행동이 이해돼서 당혹스럽다. 쓴 아메리카노를 도대체 왜 돈 주고 마시나 싶었는데 이거라도 안 마시면 도저히 제정신 차릴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일부러 두근두근 심장을 뛰게 해야만 인위적인 활기나마 얼굴에 도는 듯했다. 이제는 교회에 다닐까 성당에 갈까. 예전에는 왜 그러나 싶었던 종교 믿는 사람도 이해 가기 시작했다. 신이라도 믿어야 덜 억울할 것 같았다. 덴마크나 노르웨이 같은 복지국가에서는 사람들이 교회에 안 나가 성직자들이 힘들다는데 미국같이 천민자본주의의 국가에서는 교회가 나날이 세를 떨쳤다. 기자들이 픽픽 쓰러져 죽는다는 기자협회보 돌연사 기사를 카카오톡으로 내게 몇 명이나 보내줬는지 세어봤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그중에서 4명은 기자였고 4명은 아니었다. 이 나라에서 가장 빨리 죽는 직업을 가졌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정신이 맑았던 날이 언제인지 생각나지도 않는다. 서울에서는 불안과 초조가 일상이라 불안하고 초조하다고 말하는 것 조차 유난스러운 사람이 될 뿐이었다. 억지로 웃고 억지로 활기차고 억지로 긍정적이어야 살 수 있는 나라에서 파우스트 대신 자기계발서 따위가 베스트셀러가 되는 건 당연지사였다.


사진출처 http://blog.naver.com/kimminju33/220615429566


잔뜩 비뚤어질 테다 생각하고서 '뉴욕 미스터리' 단편선을 읽었다. 미녀가 짝사랑하던 미녀를 살해하고 엄마가 아들의 약혼녀를 구해주고 시한부 여성 암 환자가 자기를 강간한 아버지를 저주하는 등 뉴욕을 배경으로 한 각양각색의 단편소설이 실려있었다. 썩은 환부에서 고름을 짜내듯 도시의 각종 병리현상을 다채롭게 목도하고 있으니 아직 나의 불행은 초보적인 수준이구나 싶어서 안도할 수 있었다. 아무도 안 죽었고 아무도 안 다쳤으며 납치도 강도도 아직 겪지 못했으니 다행이구나 싶었다. 행복하다. 행복하자 우리 아프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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