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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승혁 Apr 23. 2016

둘러앉아 '수군수군'

의성어 의태어 사전│한명숙 전 총리와 백수

카페 신수동리. 출처 김공인중개사
카페 신수동리. 출처 김공인중개사


그네들이 둘러앉아 수군거리자 이쪽도 하는 수 없이 수군거렸다.


 마구 찍어놓은 점들이 이어져 급작스레 하나의 모양이 되는 때가 있다고 들었다. 2014년 여름. 직업도 할 일도 전혀 없던 나는 마포구 신수동 어귀의 단골 카페에 앉아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었다. 사실 따뜻한 라테일 수도 있었다. 후덥지근한 여름 냄새가 기억나는 걸 보면 차가운 음료가 사실일 가능성이 더 높았다. 기억이 뒤죽박죽이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내가 노트북으로 무언가를 끼적이고 있었다는 것이다. 가게 전면에 끼워진 커다란 유리창에서는 농익은 햇살이 공격적으로 쏟아졌다. 나는 게걸스럽게 차가웠을 무언가를 마시며 맞은편에 앉아있는 중년 여성을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새하얀 블라우스를 입은 그는 새카만 양복을 입은 남성 네다섯 명과 커다란 테이블에 앉아있었다. 그네들은 볼륨을 하염없이 낮춘 채 수군거렸다. 이따금씩 미간을 찌푸렸으며 종종 웃기도 했다. 사소한 걱정을 읊조리는 것 같다가도 혁명을 모의하는 비밀조직처럼 무게를 잡았다. 할 일이 전혀 없는 백수가 대낮부터 퍼져있는 카페에 그네들이 어쩌다가 찾아오게 되었는지 궁금해졌다.



 나는 하얀 블라우스의 얼굴이 익숙했다.


 내가 2006년 대학에 막 입학했을 무렵 헌정 사상 첫 여성 국무총리라며 텔레비전에 하루 종일 나오던 얼굴이었다. 당시 대통령은 지금의 대통령이 주장하는 '창조경제'만큼이나 뭔 말인지 이해가 안 되는 '좌파 신자유주의'를 한다며 한미 자유무역협정 체결을 진행했다. 당장 생계에 위협을 느낀 농민들이 집회 시위를 시작했다. 여성 인권운동가 출신으로 인자한 얼굴을 한 그는 텔레비전에 나와 불법시위를 엄단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전부터 그들은 시위를 막겠다며 톨게이트를 봉쇄하고 농민회 간부를 미행했으며, 전경버스에 사람들을 가뒀다. 국가 인권위원회에서 정부에 권고안을 내놨지만 경찰청장은 가벼이 무시했다. 시위 집회 현장에서 기자들이 전경에게 얻어맞았다. 60대 후반과 40대 중반의 농민 2명이 전투경찰에게 맞아 죽은 다음 해 노동자 1명이 집회 현장에서 또 죽었다. 계속해서 정부가 집회 시위를 틀어막고 사람들이 죽어나가자 국가 인권위원회에서 헌법을 지키라며 재차 시정을 요구했다. 그런 시절에 국무총리를 했던 하얀 블라우스 얼굴이 쉬이 잊힐 리 없었다. 그는 검정 양복을 입은 남자들과 둘러앉아 '새정치민주연합'이라는 당시 참 생소한 이름을 한 정당의 운명을 걱정하고 있었다. 카페 사장님과 나는 수군거리는 한 무리를 바라보며 하얀 블라우스가 정말 한명숙 전 총리가 맞는지 수군거렸다. 바삭 마른 햇빛을 받아 단아한 미소가 반짝거렸다. 카페 문이 열릴 때마다 후덥지근한 여름 공기가 안으로 급습해왔다.


"나는 '신자유주의자'이지만 '좌파'다"


 네모난 텔레비전 앞에 서서 국회 출입 기자들이 수군거리고 있었다.


 흥건한 땀이 등에 배어나오는 날이었다. 연합뉴스 속보 알림 때문에 시시각각 스마트폰이 부르르 떨었다. 2015년 8월 20일 대법원은 뇌물수수 혐의를 받고 있던 한명숙 전 총리에게 징역 2년을 확정했다. 검찰이 무리하게 수사했기에 한 전 총리 측이 충분히 억울해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막 정치부 기자가 된 나는 첫 정치면 기사로 한 전 총리의 이력에 대해 썼다. '여성운동계의 대모이며 헌정사상 첫 여성 총리, 참여정부 초대 환경부 장관이다' 그렇게 그의 과거를 끼적이자니 1년 전의 수군거림이 떠올랐다. 카페에 앉아 진한 여름 햇빛을 받으며 미소를 짓던 그. 수군거리던 검은 양복들. 옛 총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백수. 죽은 농민과 노동자. 전투경찰. 신자유주의를 했지만 자기는 좌파라는 김상혁식 합리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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