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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승혁 Apr 23. 2016

넘칠 듯 말듯 '찰랑찰랑'

의성어 의태어 사전│찰랑찰랑 미묘한 균형이 깨지고 철썩철썩 주먹이 오간다

가득 찬 술잔. 인스타그램

위태롭게 찰랑찰랑


맑은 소주가 표면장력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잔을 넘지 않을 때 마음이 흡족하다. 복숭아나무와 바둑과 술만 있으면 신선이 된다는데 하이브리드의 세계에는 복숭아 맛 소주가 있으니 우리는 효율적으로 신선이 될 수 있었다. 술집 찬장 위 좁은 곳에 욱여넣은 텔레비전에서는 쉬지 않고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국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바둑마저 갖춘 우리는 신선이 되어 예의 바르게 잔을 들었다. 찰랑찰랑. 넘칠 듯 말듯 파르르 떨리는 술잔을 들 때면 누구라도 공손해질 수밖에 없었다.


여러분 공부하세요!! 표면장력의 원리. 중도일보


건배를 하기 위해 최대한 단단히 잔을 붙잡고 천천히 몸 바깥으로 밀어냈다. 여승이 합장하듯 잔과 잔이 고요히 오갔다. 수면에 퍼지는 미세한 파동이 침묵 속에서 거대한 쓰나미처럼 느껴졌다. 쨍 소리 나게 잔을 거만히 부딪힌다면 신선수가 넘쳐 손등과 탁자를 적실 것이었다. 찰랑찰랑. 꽉 차 빈 곳이 없되 모두를 겸손하게 만드는 그 모양새가 새삼 아름다웠다. 제 멋대로 사는 다 큰 남자들이 가득 찬 소주잔 앞에서만큼은 몸가짐을 조신하게 했다. 제를 받는 신선이라면 마땅히 성스럽게 움직여야 했다. 윗입술 아래에 술잔을 가지런히 대고 후루룩 천천히 소주를 삼켰다. 턱 아래에서부터 가쁜 취기가 훅 올라왔다.


생머리 찰랑찰랑♬ 사다코상~!


허리까지 찰랑찰랑 긴 머리가 흘러내렸다


바람이 불면 부챗살처럼 펼쳐지는 생머리 앞에서 그는 수줍어했다. 짓궂은 친구들이 놀려댈수록 그는 점점 더 공손해졌다. 빈 운동장에 공 하나 띄우면 우악스러운 들소처럼 달라붙는 그가 찰랑거리는 머릿결 앞에서만은 차분해졌다. 사색하는 듯 궁리하는 표정으로 있다가 그녀가 말을 걸면 얼굴이 사색이 되곤 했다. 넘치지 않게 가까스로 붙잡아둔 감정이 위태롭게 찰랑거렸다. 정치외교학과 전공수업에서 대패로 주장을 가다듬어 칼날처럼 세우던 그는 없었다. 세계무역센터를 외줄 타고 건넌 필리프 프티 마냥 좌우로 미묘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항상 뛰어다니던 그가 그녀로부터 떨어지지 않기 위해 조심조심 한 발씩 내디뎠다. 넘치지 않기 위해 잔을 두 손으로 꼭 쥐었다.


"술 마시고 싸우지 마라 진상들아"


주먹이 오간 걸 알았을 때는 이미 모든 잔이 넘친 뒤였다


몽롱한 정신으로 아랫입술이 찢어진 그에게 휴지를 건넸다. 찬장 위 텔레비전은 이미 꺼지고 술집에는 이세돌도 바둑도 없었다. 멍청하게 굴러다니는 소주병과 깨진 유리잔에는 술이 텅 빈 지 오래였다. 신선도 사라졌다. 거나하게 취해 쨍그랑 잔이 부딪었을 때 이미 고요는 끝났었다. 날카로운 소리가 커터칼처럼 귓가를 그었다. 손목을 가누지 못하는 남자들의 술잔에는 거센 파도가 몰아쳤다. 철썩철썩. 술이 넘치자 공손함은 사라졌다. 합장하듯 고요한 손길이 어느새 주먹다짐으로 변했다. 긴 머리가 찰랑거리던 그녀가 마주 앉은 친구와 입을 맞췄다는 이야기에 그는 참지 못해 잔을 던졌다. 사방팔방 술이 튀고 욕설이 번지고 둔탁한 타격음이 퍽 그럴 듯하게 들려왔다.


술집 바닥에 퍼질러 앉은 두 사람을 뒤로하고 나는 소주잔을 골똘히 바라본다. 동그랗고 투명한 빈 잔을 흔들어본다. 어루만져도 보고 뒤집어도 본다. 빈 잔은 아무렇게나 다뤄도 위태롭지가 않다. 하지만 빈 잔은 잔으로서의 정체성에 충실하지 못한 것 같아 거짓말쟁이로 여겨진다. 홀로 된 달걀처럼 고독하게 앉아있는 빈 잔을 손바닥으로 꼭 쥔다. 어미닭이 품은 듯 오른손 가운데 폭 안긴다. 잔에게는 미안하지만 마구마구 흔든다. 또르르 굴린다. 찰랑거리지 않는 술잔을 도저히 조심히 다룰 수가 없다. 나는 내 술잔을 소중한 존재로 만들기 위해 빈 병을 탈탈 턴다. 한 방울씩 모은다. 위태롭게 찰랑거릴 때까지, 찰랑찰랑 그녀를 두고 둘이 싸우든 말든 나는 빈 명을 뒤집어 톡톡 두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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