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을 해설하는 '주석'달기

by 고승혁

정치부에 온지 한 달이 됐다. 어느새 가을하늘이 공활해졌고 아침 공기가 서늘해졌다.


461번. 새파랗게 래핑한 시내버스를 타고 서초를 건너 동작을 지나 '섬'까지 간다. 졸린 눈을 꿈뻑이며 버스 안에서 조간신문을 확인한다. '경향·국민·동아·서울·세계·조선·중앙·한겨레·한국.' 네이버에서 '가나다'순으로 정리한 신문을 찬찬히 읽다보면 어느새 국회의사당이다. 본청 앞으로 파르라니 깎은 잔디가 드넓게 펼쳐져 있다. 밟으면 복숭아뼈 아래까지 폭 잠긴다. 마치 융단처럼 폭신한 잔디밭을 걸을 때면 구두에 갖힌 발이 잠시나마 덜 아프다. 멀리 민트색 돔 위로 하늘이 높다.


내 손 아님. 나 결혼 안 함


가까스로 출근한 뒤 정론관 기자실에 앉을 때 쯤이면 오전 7시30분. 기상청 출입기자인 내 동기 '홍간기자'는 그보다 훨씬 뒤에 카카오톡으로 날씨를 알려준다. 나는 우산을 챙기라는 홍간기자의 메시지를 보고 내가 우산을 챙기지 않았다는 사실만 깨달을 뿐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홍간기자의 예보는 거의 틀린다. 비는 안 내렸고 우산은 원래 필요없었다. 홍간기자는 원래 거짓말쟁이로 유명하다. 화창한 여의도.


소설가 김연수. 중앙일보. 2011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_김연수作


쉬는 날이었다. 오랜만에 좁은 책장에서 김연수의 소설을 꺼냈다. 국회에 출입한지 '한달'이나 넘은 날이었다. 나는 다시 한달이나 가서 설산을 넘은 이가 무엇을 보고 왔을지 궁금해졌다. 책은 신문보다 두꺼웠고 면이 좁았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중편소설을 찬찬히 훑어봤다. 소설에는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에 주석을 다는 여자가 나왔다. '왕오천축국전'은 본래 3권이지만 현재 남아있는 것은 1권 분량으로 된 축약본 뿐이었다. 그녀는 드러난 축약을 통해 전체를 더듬어볼 수 있었다. 텍스트의 빈 공간을 주석으로 채우는 여자. 그녀는 "주석이란 선택할 수 있는 많은 해석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채택하는 일에 불과"하다는 점을 깨달았다.


나 역시 '기사'란 결국 이 세상을 텍스트 삼아 붙이는 '주석'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하루종일 투닥거리는 새정치민주연합 사람들에게 '친노'와 '비노'란 태그를 붙여주고, '주류'와 '비주류'라 해석하는 일. 재신임을 묻는 문재인 대표의 결단을 독단적이라고 비판하거나, 정면돌파라고 치켜세우는 일. 혁신위원회를 비판하는 안철수 의원에게 초조한 나머지 자충수를 둔다고 평하거나 정확한 민심을 당내에 전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고 쓰거나. 아무튼 "가장 많은 사람들이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채택"해서 끊임없이 세계에 주석을 붙여나갔다.


주석♬


원문이 사라졌으므로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문장은 원문이 될 수 있었다_김연수

문제는 '원문'이 항상 사라진다는 것이다. '다툼'은 언젠가 끝날 수밖에 없고 남는 것은 오직 다툼에 관한 기록 뿐이다. 사람들은 다툼 그 자체를 볼 수 없고 다툼에 대한 기록만 접할 수 있다. 극단적으로 보면 누군가 치열하게 싸웠더라도 '주석'이 붙지 않으면, '기사'가 나가지 않으면 싸움은 벌어지지 않은 일이나 마찬가지가 되어버린다. 사람들은 감각으로 세계를 접하기 때문에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다면 엄연히 존재하는 진실도 없는 것과 매한가지다. 주석의 가능성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한다. 주석은 원문의 보조적인 수단이 아니라 원문 그 자체를 대체해버리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결코 '정치' 자체를 볼 수 없다. 오로지 '정치'에 대한 코멘트만을 감각한다. 종편에서 '시사평론가'란 사람들을 앉혀놓고 종일 '주석달기'에 매진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국회 정론관. 상설기자회견장이다. KT노조.

모두가 수긍할만한 주석을 남들보다 먼저 다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국회에는 각 정당의 '공보실'이 있다. 공보실에는 각종 대변인이 근무한다. 대변인들은 틈틈이 세상 돌아가는 여러 이야기에 대해 각종 브리핑을 한다. 이번주에 정의당 한창민 대변인은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 사위 마약 투약 봐주기 논란'을 비판했으며 새정치민주연합 김성수 대변인은 정부의 '노동개악'을 지적하고 '재정파탄'을 경고했다. 국회출입기자들은 브리핑을 상설 기자회견장인 국회 정론관에서 직접 듣거나, 각 언론사 마다 주어진 부스에서 모니터로 생중계 받는다.


나는 이따금씩 노트북에 브리핑을 받아치며 '해당행위'라든가 '강력규탄''처럼 일상에서 아무도 쓰지 않는 말을 기록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역사는 알고있다'와 같이 낯간지러운 교조적 문장을 두드려 넣어 본적도 있다. 대부분의 대변인들은 마치 장군과 같이 우렁찬 목소리로 카메라 앞에서 상대 당을 준엄히 꾸짖는다. 그러나 브리핑이 끝나면 살짝 객쩍은지 작은 목소리로 인사한 뒤 퇴장한다. 그럴때면 나는 헐리우드 액션활극 영화의 스태프가 된 기분이다. 컷 사인이 나면 우리의 용맹무쌍한 새정치 대변인도 눈매가 서글서글한 좋은 사람으로 되돌아온다. 무대 뒤에서는 너도나도 눈에 힘을 빼고 쉬어야 한다. 그렇지만 나는 힘이 잔뜩 들어간 정치의 문장이 늘 재미있다. 최근에 가장 맘에 들었던 문구는 "후안무치에 분노한다"였다. 누군가가 '후안무치'란 단어를 입 밖으로 직접 발음하는 걸 매우 오랜만에 봤다.


눈이 쨍하다고 불평말자


이제서야 나는 김연수가 주석을 다는 행위에는 "그 어떤 진실도, 상상도, 이해도 없다"고 적은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주석은 마치 '후안무치'란 표현과 같았다. 주석은 절대로 애매모호하면 안 됐다. 새누리당이 네이버와 다음 뉴스가 불공정하다며 양사의 사주를 국정감사에 부르자고 했을 때, 새정치가 선택할 수 있는 답은 '예' 또는 '아니오' 뿐이었다. 새정치 대변인이 '후안무치'하다고 코멘트한 건 결국 '싫다'는 뜻이었다. 당연하게도 단호한 거절 속에는 상대방에 대한 이해도 상상도 없다. 양자택일 질문에 진실이 담겨있을리도 만무했다.


모든 일에는 이해불가한 지점이 있기 마련이고 인과관계로 포획되지 않는 바깥이 존재한다. 주석은 하나의 주제를 설명하기 위해 쓰여지기에 주제와 관련이 없는 무수히 많은 문장을 덜어낸다. 세계에 주석을 다는 기자는 '야마' 바깥을 덜어내고서 멸균된 문장을 쓴다. 사람들은 백가지를 말하지만 문장은 한가지만 말할 수 있다.


주석 사망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렇다고해서 주석달기가 필요없는 사기극이 아니란 것이다. 문학평론가 권희철은 "순진한 믿음과 성급한 체념, 정확히 그 둘 사이에 '삶'은 있다"며 "구멍 뚫힌 대상에 사적으로 주석달기에 전념해야한다. 그런 방식으로만 우리는 삶의 한를 받아들일 수 있고, 오로지 그 때만이 우리의 불완전한 '삶'을 온전히 살아갈 수 있다"고 적었다. 우리가 아무리 이 세상에 주석을 단다고 하더라도 진실을 알 순 없지만, 주석조차 달지 않으면 진실을 알 수 없다는 불가능성 조차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끊임없이 주석달기를 할 때야말로 우리는 '삶'이 인과관계가 딱딱 맞아 떨어지는 주석이 아니란 걸 깨닫게 된다. 주석달기를 해야만 비로소 문장으로 포착할 수 없는 그 너머의 삶을 받아들일 수 있다.



9월 2주차 정치기사

1.[단독]대통령 공조 제안한다

2.‘불신임불사’ 文 마이웨이…새정치시계제로

3.[한국사 국정 논란]vs‘역사전쟁’

4.[내달상봉]제도논의 가능성 열어

5. ‘친노 수장’ 이해찬 ‘백의종군론’ 파장



고백할게···

사실 덜 중요한데···

내 기사라 링크한 것도 있뜸···



<<나름시리즈♬>>

아장아장 정치부 1편

아장아장 정치부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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