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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향안과수화 Oct 29. 2019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는 회사로 돌아왔다

3개월의 긴 여행을 포기하고 회사로 돌아왔다. (이 일로 고민이 많았는데 누군가 내게 나이가 들수록 제안이 자주 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상하게 그 말이 계속 떠올랐다.) 대신 매체를 옮겼고 3주가량 러시아와 폴란드로 여행을 다녀왔다. 그중 1주일은 버킷리스트 맨 윗줄에 있던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며 보냈다. 기차에서의 삶은 단순했다. 자다가 일어나서 차를 마시다가 멍 때리기. 중간중간 러시아 친구도 사귀고 러시아어도 배웠다.


여행에 대해 속속들이 적고 싶지 않다. 아직 미얀마 여행기도 마무리 못했는데. 더 바쁜 매체로 옮긴 주제에 연재를 완성할 자신이 없다. 다만 여행에서 다녀와서 두 가지 다짐을 했다.


1. 방전될 때까지 나를 방치하지 않는다.

지난 5년간 최선을 다했다. 글을 쓸 줄 몰랐고 건축과 디자인에 조예가 없었으며 촬영장을 이끌 줄 몰랐던 나는 내가 가진 힘을 모조리 끌어다가 일했다. 부딪혀야 좋아하는지, 아닌 지 알 수 있다는 생각에 주어진 일들에 감사하며 일했다. 분명 5년 전과는 달라졌다. 동시에 건들기만 해도 쓰러질 듯 예민해졌다. 일은 나의 부분일 뿐인데 그 부분이 전체를 집어삼켰다. 두려웠다. 워라밸이란 이름으로 평일과 주말, 근무시간과 퇴근시간을 가르려고도 해보았다. 하지만 새벽까지 카톡과 전화를 주고받는 내 일의 특성을 무시한 처사였다. 기분만 처참해졌다. 이제는 이분법적으로 쉬는 시간과 일하는 시간을 가르지 않는다. 다만 열심에 우선순위를 세울 생각이다.


2.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것들로 보상한다.

내 카드값 내역서를 보면 새벽 2-3시 퇴근을 피할 수 없는 마감기간 10-18일엔 모든 소비가 커피, 식사에 국한된다. 이후 19-25일은 그야말로 미친 주간. 술을 마시고 옷과 물건을 그렇게 산다. 마감에 대한 보상심리다. 기차 안에서 한 벌의 옷과 하나의 컵으로 3일을 보내며 깨달았다. 내가 진짜 좋아하는 건 그것들에 없다는 걸. 나는 술보다, 술자리에서 같이 웃을 수 있는 친구들이 좋았다. 진짜 새 옷이 필요했다기보다 어제보다 더 나아진, 근사한 인간이 되고 싶었다. 내가 진짜로 좋아하는 건 느긋하게 유리잔에 커피를 담아 마시고 이런저런 이야길 하며 걷는 것이었다. 굳이 북적이는 핫플레이스나 값비싼 파인다이닝에 가지 않아도 된다. 그게 취향과 결부되는 일이라면 내 취향은 일상적인 것들에 있었다.



욕심이 많이 사그라들었다. 덕분에 외롭다는 생각도 줄었다. 이 다짐이 지속가능한 삶을 만들어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저 5년에 대한 짧은 소회다. 다 끝난 드라마 <멜로가 체질>을 이제야 몰아본다. 서른이 되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아니다. 여전히 엉망진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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