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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향안과수화 Jan 20. 2020

두 번째 독립

연말 다시 자취를 시작했다. 본가에서 이전에 쓰던 가구, 세탁기, 집기 같은 것들을 들고 나왔다. 눈이 나리는 날이었는데 용달 아저씨랑 둘이 이것저것 옮기다가 너무 힘들어서 울 뻔했다. 도와준다는 친구들의 말에도 그놈의 자존심 때문에, 또 이 고생을 누구한테 시키나 싶어서 혼자 낑낑거리며 마무리했다.


자립. 독립이란 단어를 사전에 검색했다.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고 홀로 선다는 뜻이다. 어릴 때 나는 내가 고양이과의 인간이라 생각했다. 친구들이 동네가 떠내려가게 소리를 지르는 모습에 머리가 아파서 늘 한보 떨어져 걸었고 동생이나 사촌오빠가 집으로 친구들을 끌고 올 때면 방에 들어가 문을 잠근 채 나오질 않았다. 물론 지금도 혼자 있는 시간이 내겐 너무 중요하다.


하지만 첫 번째 독립을 시작하던 첫날 나는 내가 개과의 인간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날 밤에 엉엉 울어버렸으니까. 당시 사귀던 남자친구에게 계속해서 전활 걸었고 다음날 출근을 어찌했는지는 기억조차 잘 나지 않는다. 내가 움직이지 않는 한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 자취방이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다. 집은 질서 없이 어질러져 있었고 내 입에 음식을 넣으려면 퇴근 후 부산스럽게 요리를 해야 했다. 좀처럼 즐겁지 않았다. 모든 행동이 나의 생존에만 결부되었다는 사실이 외로웠다.


두 번째 독립을 시작하곤 내가 좀 더 노련해졌다는 느낌이 든다. 책상은 식탁으로 용도를 바꿨다. 앉아 먹고 마시고 일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었고 더 이상 밥을 지어먹지 않는다. 물도 끓여마시지 않는다. 대신 햇반과 생수를 집 앞으로 배송시켰다. 밤이면 멍하니 앉아 차를 마신다. 주말마다 본가로 가던 어린 나는 없다. 자취방이 본가에서 차로 10분 거리임에도 일주일, 이주일에 한번 갈까 말까. 안부 전화도 줄었다. 방안을 어지르는 군짓은 절대 하지 않는다. 먹고사는 일 이외의 행동으로 나를 위로한다. 책도 읽고 음악도 듣고 집을 고친다. 좀 덜 외롭다. 외출 후 돌아오면 이 집에서 안정감도 느낀다. 나만의 질서로 채워진 공간에 대한 만족감도 있고.


하지만 여전히 혼자 있는 방안의 공허가 싫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내가 배운 건 사람은 사람에게 업히고 얽혀 살아간다는 것. 언젠가 사노 요코의 만화 <요코 씨의 말>을 읽다가 "이판사판이다, 인간관계 복잡하니 매듭이 어디 지어진지도 모르게 다 뒤엉킨 채로 무덤 속까지 함께 들어가고 싶다고 생각한다"라는 글을 읽고 마음 어딘가가 읽힌 기분이 들었다. 연말에 정신적으로 외롭고 괴로웠는지 주위 사람들에게 모진 말과 짜증이 잦았다. 그게 자꾸 마음에 걸린다. 근데 또 치근거리고 싶고.


사람에 대한 기대도 없으면서, 또 뒤섞인 게 골치 아프다 투덜거리면서 사람 없이는 못 사는 사람. 그게 나는 아닐까. 사노 요코처럼. 일락이와 산책하던 습관이 남아 퇴근 후 20-30분씩 혼자 동네를 걷는다. 걸을 때마다 이 동네는 참 좋은데 독립은 외롭단 생각을 한다.


집안에 화분을 들일까 싶다. 일락이가 돌아온다면 더할 나위 없이 내 공간이 꽉 채워질 테지만. 지금은 그냥 나 말고 다른 생명력이 집안에 있다는 것만으로 독립의 용기가 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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