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전문지에 약 1년반정도 연재를 기고한 적이 있다. 애당초 연재가 완료되고 난후 이걸 단행본으로 출판하기로 했지만. 막상 연재가 끝나버리니 왠걸, 이게 다시는 쳐다보고 싶지도 않아지게 되더라는.... 연재의 고단함같은 거지.
충분히 시간이 지나 다시 쳐다보니 이제는 글 사이 사이에 숨어있는 허세가 부끄럽다. 그때가 독립하여 스튜디오를 오픈한 지 얼마 안되었기에 상대적으로는 그래도 시간이 많았을때라 어쩌면 적기였을수 있는데, 뭐랄까 스스로에게 부끄러웠고. 그렇게 시간은 또 흐른다.
시간이 또 지났다. 어느정도 여유가 생긴것인지 뇌가 포멧된 것인지 모르지만 다시 내용을 들쳐 보지 않더라도, 그 시절의 나를 직면하지 않더라도, 이제는 내 안에서 새롭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의 이것이 나중엔 또 어떻게 보여질지 모르지만 그래도 편안하게 이야기 해볼 수 있을 것 같다는 덤덤함에 힘입어 오랫동안 미루어 온 숙제를 하려 한다.
시작에 앞서 영원한 멘토이신 한남대학교 김억중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건축을 잘하는 것이 어떤것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방황하던 나를 잡아주시고 이끌어주신 분으로 이 글조차도 실은 그분의 명저 '구조로본 건축론' 에 대한 오마주에 불과하다.
교수님과 함께 멀리서 많은 격려를 주시는 지산 이양훈 선배님께도 깊은 감사. 영화감독 전광준님도 빼놓을 수 없는 소중한 인연으로 아마도 글을 전개하면서 문학, 회화, 영화, 건축, 조경에 대해 각각 한 챕터씩 할애할 계획인데 그 중에서 영화챕터의 내용은 오롯이 그의 치밀한 분석에 힘입은 것임을 미리 말씀드리니 참고하시길.
마지막으로 수많은 밤 활자를 통해서만 뵈었을 뿐이지만 문학작품 읽기를 통해 혜안을 열어주신 이어령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드립니다.
의미가 대체 왜 중요하지?
공간을 만들때 건축, 조경, 인테리어 디자이너들의 여러가지 생각들의 마지막은 결국은 손에 잡히고 눈에 보이는 물질이다. 그것들의 형태이다. 형태는 말한다. 여기로 들어오세요. 여기는 소중한 공간이에요. 저기는 천천히 밖을 보며 지나가세요...그러므로 두말할 것 없이 '형태'는 의미를 만들어내는 데 최소한의 (사실은 필수적인) 단위이다.
그런데. 정말 웃긴 사실이 있다. 형태와 그 구성의 결과들을 우리가 건축 작품을 대할때 꼼꼼히 살펴보기 보다는 오히려 그 너머 그것이 '지시하는 의미'에 관심을 두게 된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작가가 전하려고 하는 의미는 무얼까? 같은 것들이다. 아니 의미가 대체 왜 중요하지?
아이엠페이의 루브르박물관 피라미드를 예로 들어보자. 지금이야 익숙한 디자인이지만 당시만해도 적지 않은 파장을 불러일으킨 작품이다. 계속해서 늘어만 가는 박물관의 수장과 전시에 대한 요구를 모두 지하에 묻어버리고 지상에는 유리로 만든 피라밋만 두었다.
투명한 보석같은 이것은 루브르의 중정 마당 아래에 무언가 심상치 않은 것이 더 있다는 암시이며 중세의 건물들을 배경으로 하는, 오히려 정반대의 현대적 조형은 과거와 현재사이 대형박물관의 성격을 웅변하고 있는데...
잠깐...
여기서 잠시 숨을 돌리고, 사진위로 올라가서 방금의 문단을 다시 읽어보길. 대부분 추상적인 의미이고 상징이다. 다시 말해 문장만 놓고 보면 그것에는 구체적인 사실은 유리피라밋. 중정외에는 없다. 상징을 드러내는 구체적인 것은 오직, '건축'이라는 구축적 행위, 정확히는 '어떤 모양'을 '어느 곳'에 두는 것이다. 그것을 얼마나 치밀하게 완성했는가가 의도하는 의미를 전달하는 데에 필수인데,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거냐? 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가? 마침 루브르박물관의 피라밋과 비슷한 것이 한국에도 있는데 어디 볼까
서울 삼성동 아셈 A.S.E.M. 플라자의 유리피라밋. 똑같은 피라밋이다. 지리적인 위치를 떠나서 그것들의 형식은 정확히 똑같다. 광장위의 모뉴멘트. 형태와 재료도 같다. 지금은 리노베이션을 통해 다른 디자인으로 바뀌었지만 모뉴멘트를 지향하고 만들었다. 아이러니.
같은 형식이지만. 루브르의 그것이 아직도 여전하고 삼성동에선 20년만에 없어진 이유는 무얼까. 단지 그것이 루브르박물관에 있고 유명한 사람의 작품이기때문이 아니다. 왜일까요. 그 해답을 형태구성의 층위에서 살펴보면 그 이유는 의외로 명쾌하다.
일견 유사한, 두 피라밋을 달리 구분 짓는 것은 바로 유리면을 나누는 프레임의 방향인데. 페이가 유리프레임의 방향으로 선택한 것은, 피라밋의 경사면과 동일한 사선이다. 반면에 아셈의 피라밋에서는 그라운드면의 수평적 속성을 근거로 하여 수평과 수직으로 창문프레임을 나누어가기 시작한 경우이다. 그덕에 루브르의 경우, 삼각형의 두 면이 겹쳐지는 모서리를 포함하여 유리의 모든 부분이 전체의 일부분으로 기능하고 있어 입체적인 조형미뿐 아니라 형태적 순결함에서 오는 기념성을 쉽게 얻어내고 있는 반면에, 아셈은 두면이 만나는 모서리는 조각난 유리들을 맛대어 모서리를 만든다.
얼핏 2d입면도에서 합리적으로 보여지기야 하겠으나 실제공간에서는 그렇지 않다. 단지 캐드상에서 작도하기가 편했기때문인지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피라밋 자체가 갖는 완결성의 명료함이 아셈에서 성취되지 못하고 있음이다. 형식은 차용했으되 형식화의 과정에서 아깝게 실패한 경우.
작은 부분이랄 수 있는, 프레임이라는 의장적 요소가 그것이 갖는 ‘방향’이라는 속성에따라 그것이 속하는 전체의 의미를 구현하는데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작가는 형태를 선택하는 것이같지만 실상은 바로 ‘형태’가 가지고 있는 ‘속성’을 선택하는 것이다.
어떤것을 어디에 두는 것. 그리하여 추상의 의미가 드러나게 하는 지극히 비추상적인 행위의 총합. 이 구축의 능력은 바로 디자이너에게는 기본적인 능력이 된다. 작품이 갖는 의미가 제 아무리 좋더라도 그것이 구체적인 형태로 번안되는데 실패한다면 그 모든 멋진 이야기들은 전부 쓸데 없는 사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저위의 문장들 대부분도 어찌보면 이 구축을 근거에 두고 살이 붙어나간 것이도 하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바로 이 기본중에 기본이란 것.
건축가 혹은 조경가의 창작과정이란 것.
이것이 우리 눈에 드러나는 것이 아니란 것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