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설계사무소의 한 장면을 떠올려보자. 느즈막한 아침 스케치와 트레이싱지로 가득한 방의 주인이 어슬렁 나타난다. 직원들과 인사말을 주고 받은 소장님은 색연필 몇개를 집어들고 드로잉테이블에 앉아 트레이싱지 이곳저곳에 알수 없는 낙서와도 같은 끄적임으로 수분을 보낸다. 이윽고 연필을 고쳐 잡고 그리기 시작한다. 속도가 붙는다. 이곳 저곳 그의 눈이 닿는 곳엔 여지없이 경쾌한 놀림의 연필이 쫒아 간다. 전날 밤까지 모두의 고민이었던 새로운 광장의 디자인이 완성되었다.
후배가 묻는다. 팀장님 봤어요? 소장님이 지금 그리고 있는 거....응, 지난번 말씀하셨던 그 디자인인데... 아 저게 저렇게 바뀌는 구나. 좋네.
줄곧 보아 왔어도 이야기하는 것은 한마디. 좋네.
이게 그런 거란 말이지. 보았어도 보지 못하는 초인의 영역. 인간계와 신계의 사이에 설계가 있다는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닌 것이, 이 세계안에서 형태들은 아비규환을 경험하게 된다. 기둥은 늘어나고 벽은 날라가고 이 바닥이 저 계단에 먹히고 천정이 솟구친다. 짧은 순간 정신없이 부딛히며 갈라지고 나누어지고 잘려지고 조합된 형태들은 나는 이렇게 해서 구부러졌어요. 저렇게 해서 쟤 다음에 서 있게 되었어요 라는 말이 없다. 그냥 있을 뿐...
오죽하면 학교에서조차 이것을 블랙박스라고 가르친다.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설계방법론 수업의 첫 시간. 교과서 오른쪽 페이지 아래편에는 순서도처럼 표현된 설계프로세스다이어그램이 있더라. 오호라 설계하는 방법이라니 어디 한번 보자. 왠걸, 거기에는 조사/분석과 결과물 도출의 사이에 기다랗고 큰 공백이 대안과 피드백이란 이름으로 자리하고 있었고 이 두개를 합하여 설계과정의 핵심은 바로 이 블랙박스라고 하는 미지의 과정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접하게 된다. 아예 한 술 더 떠서 그것이 디자이너의 고유영역이라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는 기가 찬 소식도 듣는다. 설계방법을 가르치는 수업시간에 교재는 자기들도 모른다고 하니. 이게 뭔가.
그냥 하라는 거다. 될때까지.
며느리도 모르는 그 세계는 심지어 우리가 유명한 작품을 대할때에도 여전히 똑같다. 선유도 공원으로 답사를 간다고 치자. 답사전 공부를 한다. 기존의 정수장이라는 구 산업의 유산, 콘크리트 박스 안에서 생명이 자라게 하는 도시재생프로젝트라고 한다 오 좋아 밑줄 쫙. 답사를 갑니다. 오 역시 기존의 정수장, 산업의 유산인 콘크리트구조물에 식물을 자라게 하여 재생시켰네. 오 좋네.
근대건축의 5원칙. 어 대단하다. 큐비즘. 와 대단하다. 유럽까지 답사를 간다. 피로티 아래에서 기둥을 만지며 감탄한다. 와 역시 대가다. 어떻게 당시에 이런 생각을. 좋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식의 좋다니 좋지 아니한가. 라는 방식으로는. 다시말해. 우리가 하는 공부가 작품 그 자체라고 하기 보다는 작품의 주변적 상황들. 이를테면 작가가 처한 당시의 시대상황들 같은, 과 그것으로 인해 판단가능한 '상황적 의미'와의 인과관계만 살피는 공부가 되어버린다. 그 덕에 상징은 넘쳐난다. 그 덕에 작가는 위인이 된다. 허나 정작 우리가 디자이너로서 막상 뭔가를 해보려고 하면. 넘쳐나는 신화에 비해 선 두개 이어 긋고 연결성 극대화라고 하는 자신이 초라해 보일 뿐이지. 의미는 과잉을 넘어 폭발직전인데 손에 들고 있는 것은 꼴랑 선 두개. 울기직전인데 교수님은 말한다. 너의 생각을 건축화하라고. 그게 뭔지 너는 아세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