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선택의 고고학

인간은 언제부터 선택하지 않게 되었는가

by 김승주

우리는 줄곧 미래의 문제를 다뤄온 것처럼 보였다. 비인간 사고 객체, 완벽한 모사, 실패 없는 시스템, 의미의 소멸. 그러나 여정의 끝에 선 지금 우리는 하나의 불편한 사실과 마주하게 된다. 이 모든 문제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문제가 아니다. 이미 시작된 과거의 문제다.


우리는 흔히 선택을 인간의 본질로 여긴다. 자유의지, 판단 능력, 책임 있는 결정. 그러나 지금까지의 여정이 보여주었듯 선택은 선언만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선택은 언제나 실패 가능성과 함께 있을 때만 실재한다. 실패가 제거된 선택은 선택이 아니라 승인된 경로를 소비하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선택의 고고학'이다. 인간은 언제부터 선택을 빼앗겼는가가 아니라 '언제부터 선택을 위임하기 시작했는가'를 발굴해 내는 작업이다. 그 발굴은 아마도 길을 잃지 않게 해주는 내비게이션에서, 혹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알지도 모르는 알고리즘의 '당신을 위한 추천 영상'에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선택의 위임은 폭력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누군가가 총을 들고 판단을 강요하지도 않았다. 그 대신 시스템은 더 안전하고 효율적이며 실패하지 않는 최적의 답안을 귀띔했고 우리는 그 제안을 거부하지 않았다. 거부하기엔 그것은 너무나 합리적이고 매혹적이기 때문이다.


정답만을 쫓는 삶은 교묘하게 편집된 녹화 방송과 같다. 겉으로는 큰 문제없이 훌륭해 보이지만 거기엔 생명력이 없다. 반면 당신이 만들어갈 삶은 거칠고 투박한 생방송이다. 방송 사고가 날 수 있기에 그 모든 순간은 진짜다. 하지만 누군가는 방송 사고가 두려워 내 인생의 마이크를 시스템에게 넘겨주고 관객석에 앉아 박수를 치는 쪽을 택할지도 모른다. 난 아무도 마이크를 필요로 하지 않는 가능성의 파편이 너무나도 두려울 뿐이다.


나는 지금 당신에게 시스템을 파괴하고 원시로 돌아가자고 선동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자본과 기술이 주는 생존의 토대를 거부하라고 말할 자격조차 없다. 나 역시 그 토대 위에서 안락함을 누리는 수혜자이기 때문이다. 21세기 대한민국의 중산층으로 살아오며 돈이 없어서 굶은 적은 없다고 솔직히 고백하겠다.


생존은 지극히 중요하다. 질병 치료, 자산 관리, 최적의 경로 탐색은 AI에게 맡기라는 말이다. 그것은 이제 도구의 영역이다. 다만 나는 호소하고 싶다. 생존이 해결된 그다음, 당신의 존재를 규정하는 결정적인 순간만큼은 마이크를 다시 잡아야 한다고.


물론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그냥 안락한 애완동물로 살겠다. 복잡한 고민 없이 시스템이 주는 행복을 누리겠다." 이 역시 존중받아야 마땅한 하나의 선택이다. 고통 없는 삶을 추구하는 것은 생명체의 본능이며 이 또한 강요받지 않은 주체적 선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유토피아의 완벽한 안락함 속에서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결핍을 느낀다면.

정해진 정답대로 사는 삶이 내 것이 아니라는 서늘한 위기감이 느껴진다면.

그때는 부디 이 글이 건네는 투박한 '비효율'을 고민해 봐라.


데이터가 보장하는 성공 확률 대신, 당신의 직관과 심장이 가리키는 불확실한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 길 끝에는 실패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실패는 시스템의 오차가 아니라 당신이 온몸으로 겪어낸 당신의 역사다. 오직 그 실패의 흉터 위에만 '의미'라는 꽃이 핀다.


미래의 권력은 자본이나 정보를 가진 자가 아니라 결과를 책임질 수 있는 자에게 이동할 것이다. 시스템은 무한히 똑똑해지겠지만 결코 책임질 수는 없다. 기계는 전원을 끄면 그만이다. 오직 육체를 가진 인간만이 자신의 삶을 담보로 결과를 떠안을 수 있다.


결론은 단순하다.

인간과 AI를 가르는 마지막 기준은 기술도, 지능도, 감정도 아니다.

그것은 실패할 수 있는 선택을 감행할 것인가라는 태도의 문제다.


인생에 한 번쯤은 안락한 사육장의 문을 열어보라.

그 문은 잠겨있지 않다. 우리가 두려움 때문에 열지 않았을 뿐이다.

방파제 너머의 거친 파도 속으로 발을 내딛는 것. 그 선택의 결과는 오직 선택한 자만이 감당하게 된다.


그리고 그 감당함이야말로 시스템이 차려준 정답의 식탁을 뒤엎고 스스로 불확실한 밥상을 차리는 유일한 인간적 행위다. 그것이 기계의 시대에, 우리가 신(神)이 아닌 선택하는 인간(Homo Elector)으로서 스스로를 증명할 수 있는 인간답고 위대한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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