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트 #10 너의 이야기

by 이승훈

"작가님!"

"아 오셨어요. 대표님."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너의 친구이자 이제는 새로운 대표인 규식씨였다. 오랜만에 만난 대표님이 반가워 단숨에 달려 나가 맞이했다. 대표님의 손에는 이런저런 선물이 한가득 들려있었다.

"올 때마다 이렇게 사오지 않으셔도 된다니까."

"작가님 제주도 시골에서 살다 보면 서울 음식도 그리울 텐데 제가 그럴 수 있나요."

대표님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아 이쪽은 제 아내, 이쪽은 저희 아이들입니다. 인사해야지."

"안녕하세요."

아직은 쑥스러운 듯 수줍게 인사를 건네는 아이들에게 웃으며 인사한 뒤 대표님의 아내분과 인사를 나눴다. 처음 보는 사이였지만, 가운데서 대표님이 어색하지 않게 분위기를 만들어주어 그리 불편하진 않았다.

"근데 정말 괜찮을까요? 불편하시면 호텔에서 지내도 되는데."

"불편하긴요. 맨날 조용한 집에서 사람 냄새도 나고 그러면 저야 좋죠."

"안 그래도 아이들이 스노쿨링이 하고 싶다고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잘됐네요."

"마침 저기 스노쿨링 장비도 있으니 챙겨서 가시면 되겠네요."

한쪽에는 여전히 새것처럼 보관 중인 스노쿨링 장비가 잘 포개어져 있었다. 대표님은 잠시 네 생각이 났는지 조용히 장비들을 어루만졌다. 그리고는 이내 가족들을 향해 말했다.

"그럼 가볼까?"

아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장비를 챙겨 집 앞바다로 뛰어갔다.


아이들에게 스노쿨링을 가르치는 대표님의 모습과 그런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고 있는 대표님의 아내. 네가 자주 앉아있었다는 평평한 현무암에 앉아 홀로 그 모습을 지켜봤다. 네가 있었더라면, 우리도 저런 모습이었을까. 아침에 일어나 우리를 닮은 아이에게 수영을 가르쳐주고, 함께 사진으로 추억을 남길 수 있지 않았을까. 또 눈물이 흘렀다.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나는 너의 눈에서 웃음보다 눈물을 많이 보이고 있었다. 대표님이 볼까 얼른 눈물을 닦아냈다.

"누가 왔는가."

옆집에 사는 어르신이 물질 채비를 하시고 옆에 와서 물으셨다.

"아 오셨어요? 규식씨라고. 승훈이 가장 친한 친구예요. 휴가에 제주도 놀러 온다길래 여기로 오라고 했어요."

"잘했구먼. 매일 조용하던 집에 사람소리가 들리니 좋아."

어르신은 무심한 듯 장비를 바닥에 내려놓더니 자리에 앉아 말을 건넸다.

"승훈이 생각나서 그러는가?"

우는 모습을 보셨는지 어르신이 물었다. 어르신의 그 말 한마디에 잠시 묻어뒀던 감정이 올라왔다. 그리고는 곧 나도 모르게 눈물이 터져 나왔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너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어르신은 그런 내가 안쓰럽다는 듯 등을 툭툭 토닥여주셨다. 한참이 지나고 내가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어르신은 천천히 이야기를 꺼내셨다.

"승훈이가 여기 혼자 내려와서 살 때 말이여. 나한테 네 얘기를 참 많이도 했어. 색시가 하나 있는데 함께 오지 못했다고. 자기를 만나면 불행해져서 데리고 오지 못했다고. 그래서 가끔 저기 하늘에 있는 양반이 참으로 원망스럽다고. 또 어느날은 갑자기 서울에 다녀오더니 얼굴이 조금 밝아졌더구나. 그래서 물었지. 그 색시랑 잘된 것이냐고. 아 근데 그놈이 말하기를 죽기 전에 자기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생겼다고 그렇게 좋아하더라니까."

"....."

"나도 젊을 적에 바깥사람이 배를 타다 파도에 휩쓸려 죽어버리고 이 나이 먹도록 혼자 살고 있단 말이지. 처음에는 딱 너 같았어. 매일같이 바다만 바라보면서 언젠가 저 사람이 바다에서 나와 나한테 걸어 나올 것 같았다고. 그날도 그렇게 앉아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구먼. 내가 이러고 있는 모습을 보면 하늘에 있는 양반이 죽어서도 마음이 참 불편하겠구나. 그때 다짐했지. 다시는 울지 않겠다고. 어떻게든 행복하게 살아서 언젠가 다시 만날 때 '덕분에 참 행복하게 살았소'하고 말할 수 있게 말이지. 그러니 이제 그만 슬퍼하고 툭툭 털고 일어나. 오랜 시간 만난 놈은 아니었지만, 그놈은 충분히 그러길 바라고 있을 놈이다."

어르신은 말을 마친 뒤 물질 장비를 가지고 대표님 가족에게로 걸어갔다. 곧 아이들은 신난 목소리와 함께 어르신을 따라 바다에 잠수하며 이것저것 잡아 올렸다. 네가 만든 인연은 다시 또 다른 인연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마지막 문장을 작성하고는 노트북을 덮었다. 길고 길었던 너와 나의 이야기가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 완성됐다. 완성된 원고를 너의 오랜 친구인 규식씨에게 보내고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꺼내 2층 베란다로 나갔다. 지붕 위에 넓게 펼쳐져 있는 잔디밭을 맨발로 밟으니, 풀의 감촉이 발로 고스란히 전달됐다. 베란다에 놓여있는 의자에 앉아 맥주 한 모금을 들이켰다. 흑색의 바다에서 넘실대는 파도와 함께 바닷바람이 부니, 여름 저녁임에도 선선했다. 너는 이곳에 앉아 무슨 생각을 했을까. 책이 완성되면 이곳에 앉아 습관처럼 혼자 맥주 한 캔을 마시던 너는 여기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마법 같았던 우리의 시간이 한 권의 책으로 완성된 오늘, 네가 있었다면 너는 뭐라고 했을까. 아마 신이 나서 규식씨에게 전화를 했겠지. 이번 책은 대박일 거라고. 기대해도 좋다고 설레발을 쳤겠지. 그리고는 나와 함께 여기 앉아 맥주 한 잔과 함께 밤새도록 수다를 떨었을 것이다. 2년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너의 얼굴이 눈에 선했다. 네 생각에 다시 눈물이 흐를뻔했지만, 이웃집 어르신의 말씀이 떠올라 간신히 참아냈다. 언젠가 너를 만나 '덕분에 참 행복한 삶을 살았어'라고 말할 수 있도록 나는 강해져야 했으니까. 그렇게 너를 생각하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맥주는 비어있었다. 날이 더 추워지기 전에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로 돌아 들어가는 와중 문득 느껴지는 이질감. 놀란 마음에 다시 바다를 쳐다봤다. 아무것도 없는 줄 알았던 흑색의 바다에서 수없이 많은 하얀색 불빛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저녁 작업을 하기 위해 떠난 배들이었다. 너는 너의 바람처럼 내게 아름다운 것들만 보여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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