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의 비상한 머리
내 머리가 많이 산뜻해졌다.
퀘퀘 묵은 물건을 보면 쓸 건지 말 건지 단번에 판단이 되고
그 판단에 어설프게 토를 달아 망설이는 것이 사라졌다.
난 그동안도 누구 못지않게 딱 쓸 것만 가지고 살았다고 자신했었는데
아낀다고 추억이라고 놔뒀던 물건의 가치가 그 물건에서 보이지 않았다.
뭐든 정리의 기준이 확실해졌고 행동도 민첩해졌다.
일의 순서가 보이고 일을 시작하기 전에 힘들 텐데 하는 미적거림이 없어져
넓지도 않은 미국 아파트 청소기 돌리는 것을 이젠 쉬지 않고 한 번에 마친다.
겨우 20평이 될까 말까 하는 넓이지만 하나 있는 방의 바닥이 카펫으로 되어서
그 방을 하기 전에 잠깐이라도 쉬어야 했는데 한 번에 다 하고도 지치지가 않았다.
머리가 다 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몸에 보내어 가능해지는 것 같다.
물건만 그런 게 아니다.
이젠 컴퓨터 안에 늘어놓은 것들에도 정리를 해야 한다고 덤빈다.
그동안 잘 모셔 두기만 했더니 버전이 맞지 않아 아예 열리지도 않았고
그사이 인기가 많아졌는지 공짜로 쓸 수 있었던 것이 이젠 돈을 내라고 한다.
한 번은 해 봐야지 하며 다운로드한 것들이 다운로드하면서 만족이 되었는지
전혀 열어 본 흔적도 기억도 없어 더는 이런 호기심은 필요 없다는 것을 알았다.
버린다.
2년간 억지로 할 수없이 해야 해서 한 일들이 나를 위해 한 일들은 아니었지만
내 머리와 몸을 쉴 새 없이 움직이게 만들더니 일에 부담은 줄고 근력이 붙어
그게 습관화가 되었는지 그런 머리와 몸의 운동들이 이제 빛을 발하고 있다.
일본에서 친구가 딸을 데리고 부산에 왔다.
그것도 5월 연휴에... 연휴는 피해서 오라고 그렇게 말을 했는데
회사에 다니는 딸아이와 같이 오려니 어쩔 수 없었다고 하면서
어차피 언어가 걱정이 되니 따로 호텔에 가고 싶지는 않다고
좁은 방이라도 침대가 하나뿐이어도 바닥에서 자도 된다고 한다.
전 같으면 우선 번거롭다는 생각부터 시작해서 부담으로 귀찮아했는데
이런 일이 나를 사회로 끌어낸다는 생각으로 그래야 고립되지 않는다고
혼자 지내는 나를 위해서라도 이건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을 바꿨다.
엄청 대견하게도 말이다.
3박 4일로 모녀가 오고 첫날밤에 나만 주변에 있는 찜질방에서 잤다.
다른 곳에 방을 빌리자고 하니 그냥 바닥에서 자도 된다고 했는데
슈퍼싱글 침대를 놓고 슬리퍼를 신고 사는데 바닥에서 잔다는 것은...
침대가 넓어서 여자 둘이 자는 것은 가능한데 남은 한 명은...
그래서 이참에 침대겸 소파를 사면 친구가 올 때 쓰기 좋은데 하다가
친구가 얼마나 자주 온다고 하는 생각을 하니 비용도 만만찮고
간의 침대는... 하니 나중에 접어서 어디에 둘 건지 하는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그냥 이불을 사서 바닥에서 자면... 이것도 둘 곳이 없어서
이 궁리 저 궁리를 하다가 찜질방이 떠올랐고 그러지 않아도 가고 싶었는데
이참에 가자고 마음먹고는 내가 찜질방으로 가 자기로 했다.
그럼 물건도 많아지지 않아서 좋고 비용도 절감이 되고 난 하고 싶은 걸 하는
이런 나의 머리 회전에 찬사가 절로 나왔다.
둘째 날은 10시쯤에 친구 딸아이가 찜질방이 뭔지 가 보고 싶다고 했는데
그 딸아이가 찜질방에 누워 꼼짝을 안 해 그대로 다 같이 찜질방에서 잤다.
셋째 날에는 딸아이가 사야 한다는 화장품들을 찾아다녔더니 바빴는데
11시가 넘어 방에 왔다가 나만 찜질방에 가려고 일어나려니 힘이 빠졌다.
꼼짝을 하기가 싫다고 하니 친구가 다 같이 이 방에서 자자고 하면서
친구가 바닥에서 자겠다고 하는데 이불은...
이때 산뜻해져 있던 내 머리가 움직였다.
침대를 가로로 해서 세명이 자면 되지 않겠냐고 하니 친구가 기발하다고 한다.
벽에 붙은 침대를 베개가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벌려 놓고
다리를 뻗을 수 있게 집안에 있는 의자 세 개를 침대에 붙였더니 딱이었다.
베개는 두 개였는데 친구 딸아이는 베개를 안 쓴다고 해서 하나는 내가 쓰고
하나뿐인 이불은 가로로 모녀가 쓰고 나는 겉옷을 덮었다.
잠깐 잠에 들었다가 깨어서는 한참을 뒤척였는데
내가 움직일 때마다 좋은 매트리스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듯이 소리가 나서
엄청 신경이 쓰이는데도 피곤한 몸은 찜질방에 갈걸 하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친구와 친구 딸이 깨지 않도록 소리가 나지 않게 돌아 눕는 방법을 찾으려 애쓰며
다시 잠 속으로 기어들어가기 전까지 이 기발한 머리 씀씀이에 혼자서 만족과 감탄을 했다.
궁하면 통한다더니 정말 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