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0.02 (월)
전날과 같이 오전 7시쯤 아침 식사를 하고 8시 30분경 숙소를 출발했다. 어제 답사를 나섰던 계곡길을 따라 경쾌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비구름이 갠 계곡 사이로는 맑은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이날의 목적지는 남체(Namche. 해발 3,440M).
계곡길을 걷는데 멍멍이 한 마리가 다가와 꼬리를 살랑대더니 옆에 따라붙었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붙이니 아예 본격적으로 길 안내를 시작한다. 마치 이 구역의 터줏대감 마냥 사람은 헉헉대며 오르는 비탈길을 총총걸음으로 걸어 저만치 앞에 간다. 때론 지름길로 질러가며 "이쪽이 조금 더 빠르다고~"하는 듯 뒤를 돌아본다. 오르막에서 뒤처진 일행들을 기다려 천천히 모퉁이를 돌면 아니나 다를까 느긋하게 앉아 기다리고 있다. 하는 짓이 너무 기특해 주머니에서 육포 한 조각을 꺼내 입에 넣어줬다. 이 녀석, 고기 맛을 보더니 아예 남체까지 앞장설 기세다.
어제 답사했던 흔들 다리를 건너니 본격적으로 가파른 비탈길이 시작되었다. 일행들이 하나씩 뒤로 처지기 시작한다. 대략 이때쯤부터 '평소보다 숨이 금방 찬다'는 말을 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원리는 간단하다. 고도가 올라갈수록 대기 중 산소량이 줄어들기 때문에 같은 양의 숨을 들이마셔도 숨이 찬다. 게다가 오르막에선 근육이 더 많은 산소를 필요로 하니, 숨이 더욱 가빠질 수밖에 없다. 우린 충분히 자주 쉬며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원래 하루짜리 일정을 반으로 쪼개 놓은 것이라 갈 길이 멀지 않다. 서두를 이유는 전혀 없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일행 모두의 컨디션을 좋게 유지하면서 목적지에 들어가는 것이다.
한 번의 급격한 오르막 후 쉼터에 앉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하산하던 한 무리의 한국인 일행이 다가와 "안녕하세요"하고 말을 붙였다. 말을 건 남자분은 등산스틱을 배낭에 끼워 넣은 채 어깨에 DSLR 카메라를 매고 경쾌한 발걸음을 옮기는 것으로 보아, 산 깨나 타신 분 같아 보였다. 말씀을 들어보니 역시, 히말라야는 이미 수차례 다녀 가셨다고 한다. 이번에는 아일랜드 피크(Ireland Peak. 해발 5,375M)를 다녀오는 길이라고 한다. 윗동네 날씨가 어떻냐고 물으니 아주 좋다고 하신다. 서로 안전하고 즐거운 산행을 기원해준 뒤, 그분들은 다시 잰걸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정오가 조금 안되었을 무렵, 어느덧 이날의 목적지인 남체 입구가 보인다. 시리가 우리에게 잠깐 앉아서 쉬라고 하더니, Police Check Post Namche 라는 간판이 걸린 허름한 건물로 다가가 뭔가 수속을 한다. 트레커 허가증 같은 것을 발급받는 것이다. 비용은 대략 인당 10 USD.
히말라야 트레킹을 위해 받아야 하는 허가증은 이외에도 TIMS, Permit 이 있다. 모두 다른 장소에서 발급받아야 하므로 가이드 없이 여행하는 사람들은 어디서 뭘 받아야하는지 사전에 잘 알아둬야 한다. 참고로 이 Check Post 라는건 최근에 새로 생긴 것이라 과거에 쓰인 여행책에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시리가 수속을 마치길 기다리며 쉬는 사이 여기까지 우리를 인도해준 멍멍이는 등을 돌리고 제 갈길을 가버렸다. 우리 일행으로부터는 더 이상 콩고물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한 모양이다. 미안, 아무리 귀여운 몸짓을 해도 더는 줄 수 없어. 인간의 음식은 너의 건강에 해롭거든. 가능할진 모르겠지만 염분이 덜 들어간 먹거리를 들고 다니는 인간 무리를 만나길 바란다.
남체는 그 명성에 걸맞게 크고 활력 넘치는 도시였다. 롯지의 2층 방에 짐을 내려놓고 창밖을 내다보니 색색 지붕의 건물, 카페와 베이커리, 상점들이 한가득 눈에 들어왔다. 한창 번화하는 도시의 곳곳에서는 망치 소리와 톱 소리가 들려왔다. 이국적인 도시의 활력을 느끼자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식당으로 내려가 점심을 주문하고 오후 일정을 논의했다. 식사 후 어제처럼 고도 적응을 위해 약간의 산행을 다녀온 뒤 시내 구경을 하기로 했다. 특히 커피와 단 것을 잔뜩 먹기로 결의하는 대목에서 여자아이들이 크게 환호했다.
만약 어제 저녁에 남체에 들어왔다면 오늘의 오후 행선지는 에베레스트 뷰 호텔(해발 3,900M)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식사를 마친 후 시간은 이미 오후 1시 30분, 그곳까지 다녀올 시간은 없다. 에베레스트 뷰 호텔 가는 길의 중간 어디께까지 올라갔다 내려오기로 했다.
남체 뒷골목을 돌아 샹보체 방향으로 약 한 시간쯤 가파른 산길을 올랐다. 어느덧 구름이 자욱이 차오르더니 사방이 먹먹해졌다. 꼭 자욱한 안갯속에 둘러싸인 것만 같다. 사실 이때 우리의 머릿속은 이미 남체의 카페와 베이커리 생각으로 가득했다. 궂은 날씨를 뚫고 오르는 것은 한 시간으로 충분했다. 곧 발걸음을 돌려 하산을 시작했다.
서둘러 남체로 내려오는 시간은 30분이면 족했다. 시리를 숙소로 먼저 들여보내고 우리 넷은 곧바로 카페를 향했다. 카페는 근사했다. 홍대입구나 이태원에 있는 카페를 그대로 들어다가 해발 3,400미터에 박아 넣은 듯 준수하고 도회적이었다. 며칠 만에 카페인이 들어가자 심장이 두근대는 느낌이 짜릿했다. 단 것을 만난 혀는 행복감을 숨기지 않고 한 접시 더를 외쳐댔다. 그렇게 우리 넷은 한 시간 동안 앉아 수다를 떨며 음료 여덟 잔과 단것 네 접시를 먹어치웠다.
숙소로 돌아와 씻고 휴식을 취하다 일곱 시쯤 저녁식사를 했다. 밥을 먹고 있자니 각국의 트레커들이 몰려든다. 중국인들이 식당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고 앉아 있고, 우리 오른쪽 테이블에는 백인들이 앉아있다. 밥을 먹고 다음날 일정을 논의하고 있자니 한 무리의 백인들이 배낭을 메고 헤드랜턴을 켠 채 식당에 들어섰다. 루클라에서 강풍 때문에 비행기가 뜨지 못해 이틀 동안 발이 묶여있다가, 오늘 헬기를 타고 팍딩으로 날아와 곧장 남체로 들어온 사람들이다. 밖은 이미 시커멓고 어느새 비도 내리고 있건만, 이 사람들 표정을 보니 웃음기가 넘치고 신나기까지 해 보인다. "캬, 어찌됐건간에 그 고생을 해서 여기까지 무사히 도착했구나. 해냈어!" 하는 느낌일 것이다. 그러나 그 해맑음이 조금은 징그러웠던지, 율이 나지막이 "짐승들.."이라고 한다. 알아듣지 못했길 바란다.
식당은 시끄러워서 오래 앉아있기 힘들었다. 방으로 올라와 간단히 일기를 쓰고 침대에 누워 책을 읽다 잠을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