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4. 데보체

2017.10.03 (화)

by 이승환

6시 30분 기상, 7시 아침 식사는 이제 규칙적인 일과가 되었다. 각자 갈릭 수프 한 그릇 씩을 포함해 이것저것 든든하게 아침을 먹었다. 특히 찬이 주문한 Trekker's Breakfast라는 메뉴가 훌륭했다. 스텐 식판에 토스트, 반숙 계란 프라이 두 개, 시리얼, 주스와 더불어 통감자 볶음을 푸짐히 볶아 내왔다. 이 지역은 감자 농사를 많이 하는데 지대가 높아 마치 강원도 감자 마냥 찰지고 달다.


Trekker's Breakfast
갈릭 수프라기 보다는 멀건 마늘 국물에 가깝다.


식사 후 출발시간을 좀 더 앞당기자고 부산을 떤 덕에 어제보다 조금 이른 8시 20분쯤 출발할 수 있었다. 지난 이틀은 고도 적응을 한다고 조금만 걷고 충분히 쉬었지만, 오늘은 부지런히 걸어야 한다. 남체(3,440M)에서 풍기펭가(3,250M)까지 이동해 점심을 먹고, 다시 텡보체(3,860M)까지 급격한 오르막을 올라야 한다. 그리고 오늘 묵을 숙소가 있는 데보체(3,820M)에 도착하면 비로소 오늘의 일정을 마친다. 걷는 시간만 최소 5시간, 점심식사와 쉬는 시간을 포함하면 7시간 이상이 예상되는 일정이다.


사실 난 마음이 좀 급했다. 지난 며칠 일행들의 걷는 속도를 보니 영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물론 나도 힘들었지만, 일행들은 나보다 더 힘들어하고 더 자주 쉬었다. '과연 오늘의 일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을까' 하는 불안함을 마음 한 켠에 품고 길을 나섰다. 그리고 곧바로 급격한 경사가 시작되었다. 무지막지한 오르막 옆으로 초등학교 운동장이 보였다. 역시 해발 3,400미터는 클래스가 다르다. 정녕 이 동네 아이들은 아침마다 이 길을 걸어 학교에 간단 말인가.


왼쪽 펜스 너머로 초등학교 운동장이 보인다.


남체를 벗어나면 사나사(3,600M)로 향하는 능선길이다. 차오르는 구름 너머로 설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에베레스트, 로체, 아마다 블람, 탐체르쿠 등 이름도 쟁쟁한 미봉들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다만 아침부터 구름이 자욱이도 차올라 잘 보이진 않았다. 저들을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선 한참을 더 가까이 가야 할 것만 같다. 아직 갈 길이 멀다.


구름 너머 저 멀리 설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계속 이어지는 능선길


출발한 지 약 두 시간이 지나 10시 20분쯤, 사나사(3,600M)에 도착해 티타임을 가졌다. 원래 1시간 30분을 예상했는데 30분이 더 지체되었다. 오면서 자주 쉬고 노닥거리며 사진도 많이 찍은 탓이다. 조급한 마음을 티 내지 않으려 애쓰며 조용히 커피잔을 기울였다. 원래 사나사는 세계 3대 미봉의 반열에 드는 아마다 블람(6,856M)이 훤히 올려다 보이는 명당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아직 점심도 되기 전인데 이미 구름이 잔뜩 차올라 시계가 좋지 않았다. 일행들과 담소를 나누며 내일부턴 아침에 조금 더 일찍 길을 나서자고 제안했다.


티타임을 가진 사나사의 롯지


11시경 찻잔을 비우고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사나사에서 풍기텡가까지는 내리막이어서 좀 수월히 걸을 수 있었다. 다들 시간이 더 지체되면 안 된다고 공감했는지 발걸음을 조금씩 서둘렀고, 예상보다 10분 빠른 12시 20분쯤 풍기텡가에 도착했다. 풍기텡가는 계곡 물가에 있는 마을이다. 이것저것 시켜 물소리를 들으며 든든히 먹었다.


식사를 마치자 오늘의 고점인 탱보체(3,860M) 까지 두 시간 동안 고도 600미터를 올리는 험한 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음 한 구석에 다시금 걱정이 차오른다. 얘들이 잘 따라올 수 있을까. 다들 비슷한 걸 느끼는지 막내 혜정이의 얼굴에는 조금 긴장한 빛마저 느껴진다. 물을 사고 화장실도 다녀오고 신발끈을 단단히 묶었다. 카메라는 배낭에 집어넣었다. 채비를 마친 뒤 오후 1시 30분 경 다시 길을 나섰다.


걱정은 기우였다. 우린 예상했던 시간보다 삼십분 이른 오후 세시에 도착했다. 텡보체 가는 길이 기억이 잘 나지 않는 것을 보면 너무 많이 힘이 들었거나, 아니면 특별한 일이 없었거나, 둘 중에 하나일 것이다. 아마도 전자일 것이다. 텡보체에는 EBC 트레킹 코스에서 가장 큰 곰파(라마 불교 사원)가 있다. 규모나 시설을 보면 한국의 시골 암자 정도가 생각나지만, 그래도 유서 깊은 문화재라고 많은 트레커들이 들러 구경을 한다. 난 그다지 흥미가 동하지 않아 한 바퀴 쓱 둘러보고 바로 나왔다. 일행들은 법당 내부까지 들어가 한참을 구경하더니 내가 흘렸던 땀이 식어 한기를 느낄 때쯤에야 나왔다.


탱보체의 곰파 입구


트레커들 대부분은 텡보체에서 곰파 구경을 하면 같은 마을의 롯지에 묵는다. 우리가 탱보체를 놔두고 굳이 20 여분을 더 걸어내려 가 데보체의 롯지를 선택한 이유는 시설이 더 좋기 때문이다. 과연 숙소는 깔끔한 편이었다. 도착한 시간은 약 오후 3시 50분. 저녁을 주문하고 순서를 정해 샤워를 했다.


여담이지만, 우린 이날의 샤워를 마지막으로 하산할 때까지 샤워를 하지 못했다. 사실 더 위에 올라가도 샤워 시설을 갖춘 롯지는 있으나, 급격한 체온 변화가 고산증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에 예방 차원에서 샤워를 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전혀 씻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방법은 있고 사람은 닥치면 다 하게 되어 있다...


데보체 롯지의 식당


고된 하루에 대한 보상으로 이날 저녁에는 특식이 준비되었다. 바로 한국에서 가져온 누룽지! 시리에게 말린 누룽지를 건네주며 부탁하니 주방에 얘기해서 한 냄비 가득 끓여 내왔다. 볶은 김과 고추장, 쌈장을 곁들여 먹으니 이루 말로 형용할 수 없을만치 감동적이었다. 그럴 법도 했다. 거의 일주일 동안 현지식만 먹지 않았던가. 어떤 장소에서 만나는 어떤 음식은 때로 음식을 넘어 감동이 될 수 있다. 우린 누룽지를 싹싹 다 비운 뒤 주문했던 현지식도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


누룽지탕. 지금 보니 맛없어 보인다


약간의 불쾌한 경험도 있었다. 이 롯지에는 유난히 손님이 없는 가운데 한국인 손님이 많아서, 우리 외에도 50대 남성들 한 팀과 혼자 온 남자 손님이 있었다.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과 그들의 식구들 외에 손님으로 앉아 있던 이들은 모두 한국인이었다. 우리 일행은 그들과 한국말로 이런저런 얘기도 나눴다. 그런데 50대 남성팀 중 한 사람이 시리에게 반말을 하며 이런저런 잔심부름을 시켜대는 것이다. 율이 발끈해서 들으라는 듯이 "아 왜 반말질이야"라고 짜증을 냈다. 그도 들었는지 시리를 더 귀찮게 하지는 않았다. 시리는 우리가 고용한 가이드인데, 그리고 그는 시리에게 일면식도 없는 사람인데, 상당히 무례하게 느껴진 게 사실이다. 그러나 율은 나중에 누룽지를 먹으며 그 무례한 남성에게도 한 그릇을 권하는 아량을 보여주었다. 쿨한 친구다.


식사를 마치고 방에 올라가 책을 읽다 잠을 청했다. 몸이 피곤해서인지 책 읽는 속도가 더뎌, 여전히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읽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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