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5. 딩보체

2017.10.04 (수)

by 이승환

전날보다 30분 일찍 일어나 아침을 먹고 채비를 서둘렀다. 숙소를 출발한 시간은 7시 40분. 구름이 차오르기 전 예쁘고 멋진 것들을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기 위해서였다. 의도한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길을 나서자 티끌 한점 없이 맑은 하늘 저편으로 설산이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있었다.


데보체의 숙소를 나서며


이날 아침 눈에 담은 풍경은 맑고 수려했다. 물소리를 들으며 계곡길을 따라 소마레(4,010M)를 향해 나지막한 오르막을 걸었다. 소마레에서 점심을 먹고 딩보체(4,410M)까지 들어가는 일정이다. 이제 곧 해발 고도 4천 미터를 넘어선다. 다행히 아직까진 일행 중 고산 증세를 호소하는 사람이 없다. 혜정이가 경미한 두통을 얘기하는 것 외엔, 아직까지는 일행 모두 컨디션이 괜찮은 편이다. 예쁜 풍경을 보며 걷노라니 피곤함도 거의 느끼지 않은 것 같다. 풍경을 보며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사진도 찍으며 가볍게 발걸음을 옮겼다.


저 멀리 아마다 블람이 보인다


까마득한 낭떠러지 위에서 산양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출발한 지 약 두 시간쯤 뒤 팡보체(3,930M)에 도착했다. 시리가 이끄는 대로 롯지에 들어가 티타임을 가졌다. 이날 일정은 급하지 않았기에 마살라 티를 미디움 팟으로 주문했다. 따뜻한 햇살 아래 둘러앉아 설탕을 듬뿍 넣은 마살라 티를 몇 잔씩 마시며 여유롭게 휴식을 취했다. 롯지 마당 한편에는 다른 한국인 일행들이 앉아 쉬면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서로 인사를 나누진 않고 각자 일행들끼리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햇살이 이리 좋은데 뭐 굳이, 한국에서 매일 보는 한국인들을 여기서까지 만날 때마다 인사하고 다닐 필요까지야 있겠나 싶었다. 아마 그들도 나와 같은 생각이지 않았을까 싶다.


티타임을 마치고 길을 나서 소마레를 향했다. 점점 설산이 선명하고 가깝게 눈에 들어온다. 지금 내가 히말라야를 걷고 있다는 사실이 점차 실감이 난다. 지금 밟고 있는 땅은 봄 아니면 가을 같은데, 저 앞으로 만년설을 두른 산맥이 보인다. 옛 기억 저편 알프스의 풍경이 눈앞을 스친다.



점차 선명히 보이는 아마다 블람


이날 따라 짐을 실어 나르는 야크 무리를 자주 마주쳤다. 이런 길에서 야크를 만나면 다 지나갈 때까지 한편에 물러서있어야 한다.


좁은 능선길에서 만난 야크 무리


11시를 조금 넘어 소마레에 도착했다. 이것저것 시켜서 먹고 12시 30분쯤 다시 출발했다. 소마레에서 딩보체 까지는 넓은 평원 같은 길이 계속 이어진다.



맑고 예쁜 풍경을 보며 힘든 줄 모르고 걷다 보니 어느덧 이날의 목적지인 딩보체(4,410M)에 도착했다. 도착 시간은 대략 오후 2시 20분경. 우린 여기서 이틀을 묵는다. 해발 4천4백 미터의 고도에 적응하기 위해서다. 딩보체는 이 고도에 있는 마을치고 문명의 손길이 많이 느껴졌다. 베이커리와 카페가 여러 곳 눈에 들어왔다. 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고 저녁 주문을 한 뒤, 각자 방으로 들어가 개인 정비를 했다.


딩보체 마을 입구


빨래를 하고 방에 들어오니 찬이 머리를 수건으로 닦고 있다. 원래 이날부터 고산증 예방을 위해 샤워가 금지였건만 이 녀석, 햇살이 따뜻하니 머리 정도는 감아도 될 것 같다며 찬물에 머리를 감고 햇살 드는 창가에 앉아 신속하게 머리를 말리는 중이었다. 나도 망설임 없이 따라 했다. 나중에 이 얘기를 여자아이들에게 해주니 많이 부러워하고 얄미워하기까지 했다. 오지 여행에서는 남자여서 얻는 이득이 조금 있는 것 같다.


휴식을 마치자 율이 미리 봐 두었던 illy 카페로 우리를 이끌었다. 해발 사천 사백 미터에서 만난 카페 치고 상당히 훌륭했다. 커피도 괜찮았고 빵도 훌륭했다. 단 것을 좋아하는 혜정이는 특히 초코 트러플에 크게 감동했다. 트레커들이 많이 오가는 곳이라 체스를 포함해 보드 게임 몇 종을 구비하고 있었는데, 나는 찬과 체스를 한판 뒀다. 다만 우리 둘은 재미있게 뒀는데, 나머지 둘이 체스를 둘 줄 몰라 같이 놀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나중에 상점에 들러 다 같이 할 수 있는 카드 게임을 찾아보기로 했다.


한편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던 중 한 가지 사안에 대한 중대 논의가 있었다. 숙소를 옮기자는 얘기였다. 이날 우리가 짐을 풀고 나온 롯지는 방에 볕이 잘 들고 식당도 훌륭하고 모든 것이 맘에 들었으나, 단 한 가지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화장실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았던 것이다. 변기 시트가 떨어진 지 오래되어 보이는데 교체하지 않은 채 그냥 쓰고 있었다. 시트 없는 변기에 맨살을 대고 앉아 볼일을 봐야 할 판이니, 여자들이 훨씬 더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율과 혜정은 격하게 공감하며 열변을 토했고, 지금 차를 마시고 있는 카페가 바로 옆 건물에 롯지를 같이 운영하는데 시설이 괜찮으니 이곳으로 옮기자고 했다. 오늘 짐을 푼 숙소에서 이미 저녁식사까지 주문했으니 하루만 그곳에서 버티고 내일은 이곳으로 옮기자는 것이다. 남자 둘은 순순히 동의했다. 저녁 식사 후 시리에게 롯지를 옮길 것을 제안해보기로 했다. 다만 우리의 제안에 어쩌면 시리가 난감해할 수도 있겠다는 우려 섞인 얘기도 몇 마디 오갔다.


숙소로 들어가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시리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우리 모두 이 숙소에 만족하는데, 화장실 때문에 너무 힘들다고. 오늘 여기서 하루 묵은 다음에 내일은 저쪽 아래에 있는 롯지로 옮기면 안 되겠냐고. 예상대로 시리는 다소 난처해하는 표정을 짓더니, 같은 마을 안에서 숙소를 옮길 수는 없다고 했다. 한국말이 유창한 그가 난감한 표정과 분명한 어조로 '그렇게는 안돼요'라고 말하는 것을 보니, 속사정이 있겠다 싶었다.


어렴풋이 짐작이 된다. 히말라야를 여행하는 트레커 대부분은 현지인 가이드나 포터를 대동한다. 가이드는 트레커와 현지인의 다리 역할을 한다. 트레커에게는 먹고 잘 곳을 찾아야 할 수고로움을 대신해주고, 트레커를 상대로 영업하는 롯지 주인에게는 손님을 알선해준다. 이런 일을 계속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단골 거래처가 생기기 마련이다. 단골과 거래하면 사소한 것 하나라도 얻는 이점이 있을 것이다. 가이드 입장에서 단골 롯지는 여독에 지친 트레커를 인도할 수 있는 믿음직한 거점이다. 롯지 주인 입장에선 단골 가이드가 손님을 데려오면 아무래도 사소한 것 하나라도 더 신경을 써주려고 노력할 수 있다. 물론 어떤 가이드와 롯지는 나쁜 의도를 가지고 손님을 속여 자신들의 이득을 취할 수도 있다. 이 모두 사람 사는 세상이라면 어디나 있을 법한 거래 관계다.


이 상황에서 시리의 의견을 묵살하고 꼭 숙소를 옮겨야겠다고 생떼를 부리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다. 이곳 히말라야에서 우리 일행은 이방인이다. 우리에게 시리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앞으로 일주일 넘게 우리를 인도해줄 가이드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서 좋을 일이 없다. 그리고 그에 앞서, 우리의 제안이 시리의 사정을 정말로 난처하게 할 수 있다는 점도 인정해야 한다. 이곳 네팔은 개발 수준이 낮으며 히말라야는 세상에서 가장 고립된 지역이다. 경제개발 수준이 낮고 폐쇄적인 사회일수록 개인적 네트워크의 힘은 막강하다. 만약 시리가 거래처의 신뢰를 저버리는 행동을 했다는 소문이 한번 돌면 상당한 파급효과가 뒤따를 것이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그에게 제안한 얘기는, 업계에서 절대로 깨지 말아야 할 불문율일 수도 있다.


베테랑 가이드인 시리는 곧 우리에게 다른 대안을 제시했다. 원래 내일 계획은 고도 적응을 위해서 여기서 쉬는 것이었지만, 오전에 이동을 해서 조금 낮은 고도의 페리체(4,280M)로 옮기는 것은 어떠냐는 것이다. 그렇다. 아예 다른 마을로 이동하면 그의 거래처와 불편한 상황을 만들지 않고 자연스럽게 숙소를 옮길 수 있다. 우리는 시리의 제안을 듣고 잠시 논의를 했다. 시리의 입장을 난처하게 하지 말자는 얘기에는 모두가 공감을 했다. 페리체로 갈 것인지 여기에서 이틀을 묵을 것인지를 선택해야 했다. 결론은 이곳에서 이틀을 묵는 것으로 모아졌다. 이날 딩보체에 들어온 후 혜정이의 두통이 조금 심해졌고, 율과 찬도 약간의 손발 저림과 피곤함을 얘기하고 있었다. 어쩌면 경미한 고산증세가 시작된 것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페리체로 이동하면 불필요하게 체력을 더 소진하게 된다. 그리고 페리체에 도착했을 때 거기 숙소 사정이 어떨지는 또 모르는 일이 아닌가. 먼 길을 걸어 기껏 거기까지 갔는데 거기서도 또 실망하면 그땐 어떻게 할 것인가. 그래서 우린 그냥 이곳에 머무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숙소에서는 화장실을 가급적 참았다가 낮에 illy 카페로 가서 해결하기로 했다.


방에 들어가 쉬는 중 율이 별구경을 나가자고 해 주섬주섬 챙겨입고 따라나섰다. 깜깜한 밤인데도 구름이 없어 시계가 탁 트였고, 보름달이 뜬 덕에 저 멀리 설산들이 선명하게 잘 보였다. 오히려 달이 너무 밝은 탓에 별구경은 제대로 하지 못했다. 환한 달과 설산과 고요함을 충만히 느끼며 시간을 보내다 숙소로 돌아왔다.


불이 꺼진 딩보체 마을 뒤로 히말라야 14좌 중 하나인 로체 (해발 8,516M) 봉이 보인다.


숙소에 들어와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 책을 읽다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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