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0.05 (목)
고도 적응을 위해 딩보체에 하루 더 머무는 날이다. 그렇다고 마냥 숙소에서 쉬는 것은 아니고 오전엔 페리체 가는 길의 고지를 올라갔다 오기로 했다. 구름이 차 오르기 전의 풍경을 감상하기 위해 어제처럼 이른 아침을 먹고 출발하기로 했다. 그래서 전날 저녁 식사 후 오전 7시에 맞춰 아침 식사를 주문하며, 더불어 오전 산행에 챙겨갈 찐 감자를 싸 달라고도 얘기해둔 터였다. 그러나 주방이 늦잠을 잤는지 아침이 다소 늦게 나왔다. 아침을 먹고 찐 감자와 물과 육포 등을 배낭에 챙겨 숙소를 나선 것은 오전 8시경. 아쉽게도 이미 구름이 차오르고 있었다.
숙소를 나서 딩보체 마을을 내려다보는 비탈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어젯밤 산책 때 얼핏 보기로 동네 뒷산 같아 보였던 길이, 막상 실제로 걸어보니 45도 경사길이다. 불과 몇 분 지나지 않아 모두들 가쁜 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역시, 해발 사천 사백 미터의 동네 뒷산은 그냥 뒷산이 아니다.
이날 일정은 적당한 지점까지 오른 후 다시 숙소로 돌아오는 것이었으므로 급할 것이 전혀 없었다. 자주 쉬고 얘기도 많이 나누며 사진도 많이 찍었다. 오히려 너무 자주 쉬는 통에 땀이 식어 한기를 느낄 정도였다. 다만 자욱하게 차오르는 구름 떼가 아쉬웠다. 에베레스트, 로체, 아일랜드 피크 등 유명한 봉들을 모두 조감할 수 있는 위치였지만, 이미 구름 떼가 뒤덮어 버려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뭐, 아쉽긴 하지만 앞으로 더 올라가면 더 가까이서 볼 수 있을 테니까.
나는 상대적으로 체력이 양호한 덕에 일행들보다 앞서가며 사진도 많이 찍고 주저앉아 멍도 많이 때렸다.
비탈길을 계속 올라 한 삼백 미터 정도 고도를 올렸을까, 율이 다가와 이제 그만 내려가자고 한다. 땀이 식어 추워하는 나에게 자신의 배낭을 통째로 건네주며 그 안의 패딩을 꺼내 입으라고 하더니 다급한 어조로 자신은 먼저 내려간다고 한다. 그러더니 휙 돌아 엄청난 속도로 하산을 한다. 화장실이 급했던 모양이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우린 고산증 예방을 위해 아세타졸이라는 약을 아침저녁으로 계속 먹고 있었는데, 이 약은 이뇨작용을 촉진시키는 부작용을 동반한다. 덕분에 수시로 화장실을 가야만 하는데 오전에 걸어온 길은 그냥 허허벌판 산비탈이라 화장실 비스무레한 것도 없었다. 율은 그렇게 엄청난 속도로 우리와 멀어져 갔다. 나중에 들어보니 우리보다 한 시간 먼저 마을에 들어갔다고 한다.
율을 먼저 보내고 앉아 찬과 혜정이를 기다려 도시락을 꺼내 먹었다. 찐 감자에 한국에서 가져온 튜브 고추장을 짜 올려 먹으니 정말 맛있었다.
도시락을 먹은 뒤 빠른 속도로 하산을 했다. 올라올 때 두 시간 이십 분 걸렸던 길을 한 시간 만에 내려왔다. 숙소에 들어온 시간은 오전 11시 50분경. 몸 구석구석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고 식당으로 가 점심을 먹었다. 바로 조금 전에 산 위에서 도시락을 먹었지만 점심도 푸짐하게 먹었다. 내가 주문한 볶음밥은 한국 중식당의 곱빼기보다 많은 양을 내 왔는데도 쌀 한톨 남기지 않고 깨끗이 다 비웠다.
난 이번 여행 내내 십 년 전의 식성을 되찾은 듯 엄청난 식사량을 과시했다. 항상 이렇게 잘 먹은 덕에 여행 내내 잔병치레를 않고 좋은 체력을 유지했던 것 같다. 일행들은 나의 식성과 체력에 놀라워하며 짐승환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반면 나와는 대조적으로, 오전 산행 때 계속 뒤에 쳐지면서 힘들어하던 혜정이는 식당에 들어오더니 밥도 먹지 않고 드러누워 버렸다. 고산증의 초기증세가 두통과 식욕 부진이라고 들었는데, 지금 혜정이 상태가 딱 그랬다. 한 숟갈도 안 뜨려는 걸 타일러서 억지로 몇 숟갈 먹게 했다. 그리고는 조금 이따 카페에 가서 단 것이라도 좀 많이 먹자고 했다.
점심 식사 후 개인 정비를 하고 약 세시 반 경 illy 카페로 향했다. 가는 길에 동네 상점에 들러 카드게임을 샀다. 종이 카드 한 세트에 300루피(미화 3달러). 그리고 물 가격을 물어봤는데, 단돈 100루피라는 말에 모두가 놀라워했다.
재화의 상대적 가치를 고려했을 때, 히말라야에서 가장 비싼 건 마실 물이다. 고지대로 올라갈수록 점점 비싸진다. 모든 물자를 사람과 짐승이 육로로 실어 나르는 걸 감안하면 수긍이 된다. 아랫동네에서는 1리터짜리 생수 한 병에 100루피(미화 1달러)를 받는다. 그런데 올라가면 200, 300루피로 가격이 오르고, 더 올라가면 심지어 500루피도 받는다. 이곳 딩보체는 이미 고지대라 우리가 묵는 롯지에서는 300루피를 받았다. 두 사람이 묵는 방 하나의 숙박료가 500루피인걸 감안하면, 생수 한병에 300루피는 매우 비싼 가격이다. 그런데 이 상점에서는 롯지 가격의 3분의 1인 100루피만 받는다는 것이다. 저 아랫동네 루클라(2,840m)에서 받는 값이다. 우린 물 8병을 사서 찬이 챙겨 온 배낭에 꽉꽉 채워 넣고 상점을 나와 illy 카페로 향했다.
혜정이의 원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 일단 단 것을 네 접시 주문했다. 초코 트러플 한 접시는 온전히 혜정이의 몫이었다. 커피도 주문했다. 카페인 중독자인 찬은 도피오를 시켜 먹었다. 나와 율은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혜정이는 음료도 단 것을 주문했다. 다행스럽게도 단 것을 먹고 원기를 회복하는 듯 했다.
단것과 카페인을 섭취하며 상점에서 사 온 카드로 원카드를 했다. 초등학교 때 사촌들과 모여앉아 하던 게임인데, 이걸 히말라야에서 이 친구들과 하게 될 줄이야. 그런데 막상 해보니 다들 너무 재미있어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잘 놀았다. 이후의 여정에서도 우리는 시간 남을 때면 항상 원카드를 했다. 한국에 돌아간 후 뒤풀이 2차의 맥주 내기를 걸고.
단 것과 카페인을 충분히 먹고, 원카드도 많이 하고, 화장실도 충분히 다녀온 뒤, 밖이 조금 어두워지려고 할 무렵 숙소로 돌아왔다. 조금 늦은 6시 30분에 저녁 식사를 하고 다음날 일정을 논의했다. 투클라(4,620m)를 지나 로부체(4,930m)까지 들어가는 일정으로 계속 오르막이 이어진다. 모두가 혜정이의 컨디션을 염려했다. 아까 단 것을 먹고 원기를 회복하긴 했지만 과연 내일 일정을 잘 버텨줄 수 있을까. 일단 조금이라도 짐을 줄여주기 위해, 혜정이 개인 배낭에서는 마실물과 중간에 입었다 벗을 패딩만 남기고 모두 빼내 포터 가방으로 옮겼다. 사실 이미 짐은 많이 줄여놓은 상태여서 별 차이는 없었던 것 같지만.
저녁을 먹고 방에 들어간 뒤, 여느 때처럼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 책을 읽다 잠을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