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10. 포르체 텡가

2017.10.09 (월)

by 이승환

아침 여섯 시쯤 되니 저절로 눈이 떠졌다. 이제 몸의 시계가 이 시간에 맞춰진 것 같다.


아침 식사에 앞서 율과 찬이 모여 돈다발을 센다. 네팔 루피화로 환전해 공동으로 관리해온 예산 점검을 위해서였다. 지금까지 식비와 숙박비를 제외한 물, 간식, 핫샤워 등 추가비용은 모두 공금으로 치렀다(식비와 숙박비는 여행사에 선납). 이제 내일이면 남체에 도착하는데, 상점에 들러 각자 기념품과 선물도 사야 할 것이고 그러자면 남은 예산을 분배할 필요가 있었다.


시리와 포터분들께 드릴 팁을 제하고 남은 몫은 4등분해 나눠 가지기로 했다. 팁을 제한 뒤 남은 예산은 대략 130,000 루피 (미화 약 1,300달러, 한화 145만 원 상당). 한화로도 적지 않은 액수지만 네팔 물가로는 정말 큰돈이다. 남체에 도착하면 이 돈으로 맛있는 것도 먹고 술도 마시고 쇼핑도 할 것이다.


1,000 네팔 루피. 사람 얼굴이 아닌 에베레스트를 그려넣고, 꼬부랑 숫자에 십진수 1,000을 병기했다.
뒷면 모델은 코끼리


에델바이스 페리체 호텔은 조식도 감동적이었다. 우린 주문했던 음식을 다 먹은 뒤 아쉬운 마음에 치즈 토스트와 오믈렛을 추가로 주문했고, 그 덕에 출발은 조금 늦어졌다. 숙소를 나선 것은 대략 오전 7시 50분경. 소마레를 거쳐 팡보체에서 점심을 먹고 포르체 텡가로 들어가는 일정이다.


커피, 토스트, 계란, 감자에 야크 버터와 잼을 곁들여 낸 푸짐한 아침상
추가 주문한 치즈 토스트와 오믈렛


길을 나서니 오래간만에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이 펼쳐져 있다. 마을 어귀 저 너머에는 햇살 아래 설산이 그림처럼 자태를 뽐내고 서 있다. 이날 오전 페리체에서 소마레 가는 길에 본 풍경은 이 여정을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것이었다. 율의 말에 따르면 원래 이 길은 EBC 트레킹 지역에서 아름답기로 명성이 자자하다고 한다. 충분히 수긍한다. 그 어떤 말로도 이날 아침 눈에 담은 아름다움을 묘사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아쉬운 마음에 사진을 몇 장 소개해본다. 사진으로도 표현이 안 되는 것은 매한가지지만.



풍경에 취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걷다 보니 소마레에 도착했다. 올라갈 때 한번 지나쳤던 마을이다. 전에 점심을 먹었던 롯지로 들어가 차를 마시며 휴식을 취했다. 모두 방금 온 길의 풍경에 감탄해 '너무 예쁘지 않았니'를 연발하는데, 옆에서 듣고 있던 시리가 놀라운 얘기를 해준다. 방금 내려온 소마레 마을 초입 구간은 전에 딩보체에 오를 때에도 지났다는 것이다. 아마 올라갈 때만 해도 해발 사천 미터 지역으로 오른다는 부담감이 마음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던 터라 아름다움을 눈에 제대로 담을 여력이 없었던 모양이다. 물론 이날 아침 날씨가 유난히 좋았던 덕에 전에 안 보이던 아름다움이 보였을 수도 있지만.


차를 마시고 다시 길을 나서 팡보체(3,930m)를 향했다. 이젠 고도가 낮은 지역이라 길에 트레커들이 많이 다닌다. 시리에 따르면 우리가 루클라 공항에 내린 뒤 강풍이 심해 이틀 동안 비행기가 뜨지 못했고, 트레커도 거의 들어오지 못했다고 한다(덕분에 우린 올라갈 때 다른 사람들과 많이 마주치지 않고 한적한 여정을 즐길 수 있었다). 그리고 이틀 뒤부터는 다시 날씨가 좋아져 밀렸던 비행기가 사람들을 계속 실어 나른 덕에, 지금 이렇게 길가에 트레커들이 북적인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우리가 내려온 뒤 로부체에서는 모든 롯지가 만실이 되어, 숙소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빈 방을 찾아 다시 페리체로 내려가는 사태가 벌어졌다고 한다.


팡보체에 들어가기 전 엄홍길 재단에서 세운 학교 앞을 지나쳤다. 한국말로 쓰인 푯말을 보니 새삼 반갑다. 학교 초입을 조금만 돌아 내려오면 바로 팡보체 마을로 이어진다.


팡보체 마을은 윗마을과 아랫마을이 있다. 우리가 올라갈 때 지났던 곳은 아랫마을이었고, 지금 내려온 곳은 윗마을인 어퍼 팡보체(Upper Pangboche)였다. 도착한 시각은 대략 오전 11시 10분경. 시리가 이끄는 대로 마을 골목길을 굽이굽이 돌아 찾아간 롯지는 마침 영업을 하지 않았다. 다시 마을을 한 바퀴 돌아 나와 초입에 있는 롯지로 들어갔는데, 마당의 파라솔에 유럽인 무리가 식사를 마치고 앉아 볕을 쬐고 있었다. 세계 어딜거나 한국 사람들은 햇볕만 보면 그늘로 피신하고 선크림을 듬뿍듬뿍 덧바르는데, 백인들은 볕 드는 곳이면 어디서나 일광욕을 즐긴다. 히말라야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포르체 텡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마을 밖을 나서 얼마 가지 않아, 아침부터 계속 내리막을 걸어왔던 우리를 비웃기라도 하듯 반전같은 절벽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찔하게 깎아지른 절벽 옆으로 한두 사람 지나갈 수 있는 좁은 길이 이어지는데, 롤러코스터 마냥 오르막과 내리막이 번갈아 나왔다. 가파른 경사의 돌계단을 힘겹게 오르고, 오른 만큼 다시 내려가고, 모퉁이를 돌면 다시 오르막이 나오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오르막이 나올 때마다 일행들의 표정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45도 경사 절벽 길에서 평화로이 풀을 뜯고 있던 어린 좁키오


험한 길이었지만 그나마 풍경이 예쁜 덕에 아무 생각없이 계속 걸을 수 있었다. 오후 3시 20분경, 포르체(3,860m)에 도착했다. 포르체 마을은 배산임수의 조건을 충실히 갖춘 근사한 입지에 자리하고 있다. 등 뒤로는 웅장한 산세를 업고 앞으로는 절벽 아래 계곡물이 흐르고 있다. 멀리서 보면 산맥이 마을을 품고 있는 형세다. 마을 안에 들어서자 수많은 야크와 좁키오가 풀을 뜯고 있는 것으로 보아 목축업이 발달한 듯 싶었다. 야크 목에 달린 종소리가 바람을 타고 공명하며 풍경소리처럼 울려 퍼진다. 이때 받은 느낌을 한 단어로 묘사한다면 '목가적'이라는 표현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우리의 목적지는 계곡 아래 포르체 텡가다. 오르는 길에 들렀던 풍기 텡가라는 마을도 계곡가에 위치한 마을이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텡가'라는 말은 물이나 계곡, 혹은 아랫동네를 의미하는 것 같다. 포르체 마을을 통과해 산길을 이십여분 내려가 흔들다리를 건너니 곧 우리가 묵을 숙소에 도착했다. 이날 묵은 롯지는 전날 묵었던 에델바이스 페리체에 비해 시설과 청결도가 한참 뒤떨어지는 곳이었다. 돌고 돌아 다시 우이동 엠티촌에 온 느낌이다. 일행들 모두 많이 실망했는지 심지어 샤워도 하지 않겠다고 한다. 하루 참고 내일 남체에 가서 씻겠다는 것이다. 사실 나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시설이 좋으면 좋은 대로 안 좋으면 안 좋은대로, 씻은 내 몸이 안 씻은 내 몸보다는 더 깨끗하지 않은가. 결국 나 혼자만 샤워를 했다.


저녁 식사를 하면서 락씨라는 이름의 네팔 전통주를 한 잔 주문해 마셨다. 사탕수수로 만든 술이라고 하는데 소주나 보드카처럼 맑았다. 입에 잘 맞았다. 에탄올을 희석시킨 한국 소주보다는 몸에도 좋아 보였다. 그러나 아직 고도를 많이 내려온 것도 아닌지라, 남은 여정을 생각해 술은 한잔만 마셨다. 술기운이 오른 채 원카드를 하다 각자 방에 들어갔다. 여느때처럼 불을 끈 채 잠시 책을 읽다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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