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ourse of Love
근래 논리 글만 잔뜩 읽어 감성이 너무 메말라가고 있는 것 같다고 느끼던 차에, 회사 뒷자리의 띠동갑 사우님께 이 책을 빌려 읽는 행운을 누렸다(지수님 감사!!). 올해 읽은 책 중 유일한 소설책이다.
저자는 매우 유명한 소설가다. 작품 중 '여행의 기술'을 아마 십수년 전 읽었던 것 같은데 아쉽게도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나 내용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역시 책을 읽은 뒤엔 나의 생각과 감상을 다시 글로 적어놔야 한다. 그런다 한들 나의 빈약한 기억력을 완전히 보완하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적어놓지 않는 것에 비해서는 나의 생각과 느낌을 보다 오래도록 붙들어 놓을 수 있지 않겠는가.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이 책은 '소설과 에세이의 절묘한 만남'으로, 다소 독특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먼저 소설로서의 이 책은, 중동 출신 남주인공 라비와 스코틀랜드 여주인공 커스틴의 사랑 이야기다. 한편 저자는 이야기의 사이사이에 불쑥 일시정지 버튼을 누르고 들어가 한 단락의 에세이를 적어넣고, 다시 소설 밖으로 나와 재생 버튼을 눌러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무대 먼 발치에서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을 취하는 도중, 불쑥 펜을 고쳐잡고 논설위원의 자리에 앉아 등장인물들의 마음을 세밀하게 해설하고 음미한다. 섬세한 문학적 감성, 해박한 지식, 그 사이를 자유로이 오가는 균형잡힌 서술 모두 훌륭하다.
저자는 낭만주의적 연애관, 즉 근대 이후 등장해 현대사회 연애와 결혼의 기본적 가치관으로 자리매김한 사상을 다각도로 고찰한다. 쉽게 말해 대부분의 해피엔딩 스토리가 무책임하게 묘사해대는 '그리고 그들은 오래도록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의 민낯을 까뒤집어, 결혼 후의 삶과 사랑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등장인물들의 심리를 낯낯이 해부한다.
한편 저자의 심리학 지식이 해박함을 느낄 수 있었다. 보다 정확히 표현하면 '심리학'보다는 프로이드가 시작하고 그 후예들이 더 정교하게 발전시켜온 '정신분석학'과 '상담심리학'이 될 것이다.
오래 전 노교수님께 들은 이야기들이 생각을 스치고 지나갔다. 비록 심리학의 역사에서 정신분석학은 중심이 아닌 주변부에 머물렀지만 심리학 바깥, 그 중에서도 문학을 중심으로 인문학 전반에 걸쳐 '인간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제공하고 그 업적을 인정받았다는 이야기들이. 또 한편으로는 그저 재미있다는 말로는 부족한 무언가 복합적인 감정을 느꼈다. 나는 지금 심리학과 전혀 관계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일하고 책읽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와중 이렇게 계속 심리학을 마주치고 있다. 십수년 전 내가 막연한 수준의 호감을 가지고 선택했던 전공을.
더 이상의 자세한 묘사나 요약은 생략해야할 것 같다. 문학 작품이지 않은가. 관심있는 사람은 직접 읽고 느끼고 저마다의 해석을 해보면 좋을 것이다.
생각이 난 김에 사족을 하나 적어보자면. 난 예술에 있어서만큼은 철저한 상대주의자다. 문학, 음악, 미술에 정답이나 절대적 기준 같은건 없다. 물론 앞으로도 영원히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예술평론가라는 직업이야말로 나에겐 가장 무가치한 직업처럼 보인다. '해설가'라면 모를까, '평론가'라니. 예술을 두고 평론을 한다니 이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간혹 권위있고 무책임한 누군가들이 작품에 대해 부당하고 몰상식한 권력을 행사하려고 할 때 견제해주는 정도의 역할을 해주면 딱 좋을 것 같다. 스스로가 권력이 될 생각은 하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