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너무도 거대한 생각을 품고 있기에 섣불리 요약이나 평을 하려는 시도는 애 진작에 포기했다. 먼저 깊은 존중을 마음 한 켠에 품고, 읽으며 생각하고 느낀 바를 가감 없이 적어본다.
1. 개인적 소회
칼 포퍼를 처음 만난 건 복학 첫 학기, 이제 전공 공부를 제대로 해보겠다는 마음을 다잡고 들어갔던 사회과학 조사방법론 수업이었다. ‘과학 가설은 반증 가능해야 한다’는 단순한 명제를 그땐 그저 교과서 어구처럼 받아들였다. 이후 공부를 해 나가면서 이 단순한 명제 뒤에 깔린 철학을 이따금씩 음미할 수 있었다. 문명인 모두가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 현대 문명의 과실을 누릴 수 있는 것은 과학이라는 지식 획득 수단이 있기에 가능했던 것이고, 내가 하고 있는 것이 그 과학이라는 거대한 우주의 모래알 하나라는 생각에 이따금씩 전율을 느끼던 시절.
과학이라는 도구의 대전제를 깔아 놓은 사람의 생각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이 책을 읽으며 그 생각에 대한 어렴풋한 윤곽, 그리고 최근 하던 생각들 – 회의론, 불확실성, 민주주의, 열린 사회 – 이 모두 만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2. 반증 가능성과 경험 과학
현대 경험 과학의 가설 검증 절차를 풀어써보면 대략 이렇다.
1) 연구자가 검증하고자 하는 연구 가설과, 그에 대립되는 영가설을 세운다.
2) 가설을 지지하거나 기각할 수 있는 증거를 수집한다.
3) 수집한 증거가 영가설을 기각하기에 충분한 수준이면, 영가설을 기각하고 연구 가설을 채택한다. 증거가 충분치 않을 경우, 영가설을 채택하고 연구 가설을 기각한다. 증거가 얼마나 충분한지에 대한 기준은 관례적으로 5%를 따른다. 통계학의 시조 로널드 피셔가 농사판에서 정한 기준이다.
4) 연구 결과가 검증된 지식으로 공증받기 위해서는(학술지에 게재되기 위해서는) 과학계 동료들로부터 익명의 peer review를 받아야 한다. 학술지의 권위가 높을수록 검증 과정은 혹독하며, 증거는 언제든지 투명하게 공개되어야 한다.
가설 수립과 기각이라는 점에서 ‘연역’을, 증거에 대한 통계 검증이라는 점에서 ‘귀납’을 상보적으로 사용한다. 획득할 수 있는 지식을 제한적으로 인정하며 언제든 틀릴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검증된 전문가 집단이 익명으로 결과를 검증하고 결과의 신빙성에 이의가 제기될 경우 모든 필요한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한다. 과학, 과학철학, 통계학 하는 사람들 모두 이 주제에 대해 할 말이 많이 있겠지만, 이제 평범한 생업인인 나에겐 많이 재미있는 주제는 아니다. 나더러 핵심을 뽑아내라고 한다면 이렇게 답할 것이다.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지식은 언제나 제한적이며, 그 마저도 언제든지 수정될 수 있다. 따라서 그나마 신뢰할 수 있는 도구인 연역과 귀납을 상보적으로 사용하되, 언제든 틀릴 가능성을 열어놓고 모든 비판을 투명하게 수용한다.’
3. 과학과 도덕
앞서 적은 바와 같이 현대 경험 과학은 언제든 틀린걸 인정할 태도를 갖추고 있다. 그 바탕에 깔린 생각은 포퍼가 제안한 ‘비판적 합리주의’다. 포퍼는 이렇게 적었다.
‘우리 앞에 놓인 선택은 단순한 지적 문제나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도덕적 결정의 문제다.’
과학의 방법론에 대한 논의로부터 느닷없이(는 아니지만) 도덕적 결정이라는 논제가 도출되었다. 어째서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저자가 책에서 한 얘기를 아주 간략하게 요약해서 짧은 독후감을 써보면 대략 다음과 같을 것이다.
“과학이라는 지식 획득 수단은 인간 이성의 가능성과 한계를 인정하고, 언제든지 자신의 오류를 인정할 수 있는 태도를 갖춘다. 이와 같은 기준을 현실정치에도 적용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권력자는 자신의 편협한 지식이라는 도그마에 갇혀 오류 투성이 추론을 하고, 더 나아가 자신이 ‘옳고’ 타인은 ‘그르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어, 결과적으로 멍청하고 위험한 생각을 주체하지 못해 전체주의라는 파국으로 치닫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저자에게 동의하는 독자라면, 자신이 선 자리에서 항상 열린 사회의 가치를 지키고 가꾸려는 노력을 하자”
이 대목에서 스티븐 핑커가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 적은 구절이 떠올랐다. 아마 핑커도 이 대목을 적으면서 포퍼를 회고했을 것이라 생각해본다.
“우리가 물리적 세계에 대해서 무언가를 논리적으로 증명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물리적 세계에 대한 어떤 믿음들이 사실임을 확신할 수는 있다. 이성과 관찰을 적용하여 세계에 대한 잠정적 일반론을 발견하는 것, 그것을 우리는 과학이라고 부른다...따라서 과학은 지식을 얻는 방식에 대한 패러다임이다. 특정 기법이나 제도가 아니라 가치 체계다. 세계를 설명하려 노력하는 것, 후보로 떠오른 설명들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것, 지식이 늘 임시적이고 불확실하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 이것이 과학이다.”
(스티븐 핑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중)
4. 과학, 민주주의, 금융시장, 열린사회
포퍼를 처음 접했던 2007년 이후 몇 년 간 세상은 참 어지러웠다. 전과 11범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위대한 지도자였던 전직 대통령은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한편 금융시장은 자본주의의 종말이 올지도 모른다는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 돌이켜보면 내가 대학원에 진학했던 건, 당시의 어지러운 세상사에 개인사가 더해져 모든 것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었던 동기도 상당 부분 작용했던 것 같다. 물론 사회심리학도 재미있었지만.
당시 철부지였던 내 눈에 과학계는 어지러운 현실 세계와는 유리된 고고한 상아탑처럼 보였고, 이성과 합리와 정합성으로 대화할 수 있는 곳이었으며, 역으로 현실 세계는 이성과 합리와 정합성 따위는 없는 아수라장으로 보였다. 전과 11범을 대통령으로 뽑아주는 사람들이나, (무슨 얘기인지 잘은 모르겠으나) 탐욕에 눈이 멀어 자본주의 세계 전부를 위기에 몰아넣었다고 하는 금융쟁이들이나, 그냥 다 어지러운 사바세계로 보였다.
그리고 나이를 몇 살 더 먹은 뒤엔 누구나처럼 생업인이 되어 있었고, 그리고 또 뒤늦게 자산 증식을 위해 주식 투자를 시작했다. 그리고 매우 재미있게도, 투자 공부를 하다가 칼 포퍼라는 이름을 다시 마주치게 되었다. 그것도, 모든 잘난 척하는 사람을 신랄하게 씹어버리는 희대의 독설가 나심 탈렙의 책에서. 포퍼의 이름을 사바세계에서 다시 만나며 느꼈던 아주 상징적인 포인트를 두 개 뽑으면 1) 탈렙이 포퍼의 극진한 빠돌이였고 2) 전설적인 투자자 조지 소로스가 포퍼의 제자였다는 사실이다.
이제 생업인이 되어 푼돈이라도 좀 더 벌어 보자고 시작했던 투자 공부에서 포퍼를 다시 만나다니, 정말 의외였다. 그 일이 계기가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투자 관련 서적도 점차 다른 각도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해왔던 공부, 이제 밥벌이에 써먹고 있는 통계와 데이터 분석(과학이라고 하기에는 역시 좀 낯 간지럽다), 금융과 투자, 이 모든 것들이 다 연결되는 것이었다니...
한편 최근 트레바리의 돈돈에서 ‘G2전쟁’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이걸 읽고 생각을 곱씹다가 생각을 조금 더 확장하게 되었다. G2전쟁에서 저자 레이쓰하이는 미국의 달러 패권에 대항해 중국도 금융 강국이 되어야 한다는 프로파간다를 쏟아냈는데, 이 생각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다가 마지막에 생각이 닿은 지점이 ‘열린 사회’였던 것이다...(글 링크)
그리고 나서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을 한 번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중이었다. 마침 국경에서 이걸 읽으신다는 소식을 듣고 낼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 읽고 난 지금의 소감은, ‘이렇게 모든 생각이 만나는군. 포퍼 형 흐엉헝 ㅠㅠ’ 정도가 되겠다.
5. 포퍼의 싸움은 진행 중
포퍼가 이 책을 쓰기 시작한건 1938년이다. 히틀러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침공한 사건이 이 책을 쓴 계기였다고 한다. 서양 철학과 사상의 거두라고 할 수 있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헤겔, 마르크스를 차례로 논파하며 5년 동안 전투적인 자세로 써내려 갔다고 한다. 포퍼가 아무리 뛰어난 지성의 소유자였다고 한들, 2300년 전 살다 간 철학사의 거두부터 당대 지구 절반의 마음을 휩쓸어버린 사상의 창시자까지를 ‘역사주의’라는 이름으로 나란히 줄 세워서 깨는 건 매우 도전적인 작업이었을 것이다.
세상이 둘로 갈라져 총성과 선혈과 화염으로 물들어가던 난세, 포퍼는 펜을 들고 ‘생각들’과 싸웠다. 그 싸움은 인류 지성사의 가장 큰 적에 맞선 것이자, 당대의 절반을 휩쓴 파시즘과 다음 세대의 절반을 휩쓴 막시즘 모두에 맞선 것이다. 이 생각을 품고 서문을 다시 읽으니, 불굴의 투혼 같은 것이 느껴진다...(흐엉 포퍼 형 ㅠㅠ).
포퍼의 싸움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G2의 반열에 오른 중국에서도, 가까이는 한국 사회의 곳곳에서도 매일 벌어지고 있다. 열린 사회의 가치에 동의하는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일단은 나부터 잘 살아야겠다. 나의 일상, 나의 세상, 내가 숨 쉬고 살아가는 공간 속에서, 일단 나부터 열린 사람의 태도를 늘 실천하고 사는 것이 가장 먼저일 것 같다.
한 편 보다 원론적으로, 이 싸움은 끝날 수 없다. 반증가능성의 원리를 현실 세계에 그대로 적용하면, 세상에 정답이 존재하지 않듯 ‘더 이상 개선의 여지가 없이 완벽히 열린 사회’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열린 사회를 위한 가장 중요한 실천적 덕목은 ‘진실하고 겸허한 태도’ 그 자체가 아닐까 싶다.
비록 '열린 사회' 자체는 달성 불가한 목적일지라도, '열린 사회의 가치'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사회의 대다수를 차지하게 되어, '열린 사회의 가치를 설파하던 시절'이 오래 전 향수로 느껴지는 날이 언젠가는 올 수 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생각을 마무리 하며, 실천적 지식인의 삶을 온 몸으로 살다 간 저자의 삶에 깊은 존중을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