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모론엔 회의주의로 맞서자
거시 경제나 국제 관계는 난해한 주제다. '국가'는 인간계에서 덩어리가 가장 큰 조직이다. '국가의 경제'나 '국가 간 관계'에는 수없이 많은 변수가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본질적으로 간명하게 설명해내기 어려운 현상이다. 나처럼 심리학, 저-수준의 사회과학을 전공한 사람의 눈에는 더욱 복잡하고 난해하게만 느껴진다.
그러나 이런 현상을 설명하려는 시도를 하는 사람들, 혹은 제한적일지라도 설명해내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다. 국가의 경제, 외교, 국방 사안을 연구하고, 정책을 만들고 집행하는 사람들이다. G2전쟁의 저자 레이쓰하이도 그런 사람 중 하나다. 저자는 중국 최대의 관영 포털 사이트인 시나닷컴의 경제 칼럼니스트이자, 그 외 주요 기관의 논설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아마도 친정부 성향일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은 '미중 간 금융 패권 경쟁, 음모론'이라는 두 개의 키워드로 압축할 수 있을 것 같다. 저자는 미국 달러가 기축 통화의 지위를 누리는 원리와 의미를 설명한 뒤, 미국에 맞설 차기 패권국가 중국이 다가오는 미국과의 금융전쟁에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
저자에 따르면 기축 통화 달러의 작동 원리와 의미 - 비 기축 통화에 비해 누리는 특권 - 는 다음과 같다. 무제한 발권이 가능하고, 금융 시장에서 통화 승수를 훨씬 더 많이 팽창시킬 수 있으며, 타국에 인플레이션을 수출하고, 금리 인상이 환율 인상을 트리거하는 기제를 이용해 타국이 피땀 흘려 쌓아 놓은 부를 헐값에 빼앗아온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저자는 과감하게 주장한다. G2의 반열에 오른 차기 패권국 중국은 미국의 금융 공격에 대항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그렇게 해야 한다고. 그 방안으로 저자는 지방 부동산의 금융 자산화, 통화 독립 등을 제시한다(10장. 중국의 돌파 전략 1 - 낙후된 부문의 경제를 끌어올려라, '11장. 중국의 돌파 전략 2 - 통화 독립을 이뤄라').
여기서 한층 더 과감하게, 저자는 시간은 중국의 편이라고 적었다. 미국 경기가 회복하지 못해 강달러 전략을 지속하지 못하고, 2020년 경에는 달러화의 국제 준비통화 중 비율이 50% 선으로 하락할 것이며, 유로와 위안화의 부상으로 마침내 달러는 기축 통화의 지위를 내려놓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2019년은 저자가 이 책을 내놓은 2013년으로부터 6년째 되는 해다. 도발적인 예언은 얼마나 적중했을까?
가장 중요한 결론부터 말하면,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는 건재하다. 반면 위안화는 기축통화가 되려면 한참 멀었다. 다음은 한겨레 기사 발췌 ("달러는 왜 특별할까?" 2019.01.15 링크)
IMF가 발표한 2018년 3분기 세계 준비자산 중 달러화 비중은 61.9%로 가장 높다. 유로화와 엔화 비중은 각각 20.5%, 5.0%다. 달러화 지위를 위협하기 부족하다. 얼마 전까지 국제화를 표방했던 위안화 비중은 1.8%에 불과하다. 위안화는 2017년 1분기 비중이 0.9%였던 점을 고려하면 완만히 상승 중이지만 달러화 위상에는 한참 못 미친다.
한편 미국의 양털 깎기 공격이 현실로 일어났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이런 류의 '미국발 금리 인상 공포론', 즉 '미국이 금리를 올리면 달러 자본이 신흥국에서 이탈하고 금융시장이 붕괴할 것이라는 주장'은 적어도 2008년 금융 위기 이후로는 사실로 입증된 바가 없는 것 같다. 오히려 일각에서는 미국 연준이 중국을 포함한 신흥국 경제의 경착륙 쇼크가 글로벌 금융시장으로 전염될 것을 우려하며, 이를 금리인상 속도 조절에 반영하고 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참고 기사 : 옐런 세계경제 둔화 우려…美연준, 금리인하할 수도"). 게다가 지금 트럼프 대통령이 약달러와 금융시장 활성화를 바라고 있는 상황 또한, 가까운 미래에 연준이 공격적 금리 인상을 할 가능성이 희박함을 시사한다. 그러니, '미 금리 인상 > 신흥국 자금 이탈 > 신흥국 자산 시장 붕괴 > 신흥국 자산 약탈'이라는 도식은 복잡한 현실에 비해 너무도 단순한 관점이라고 의심하는 게 합리적일 것이다.
저자의 대담한 예측이 실패한 것을 보면 그의 사고에 오류가 있었거나, 혹은 의도적으로 오류 투성이 논리를 생산해 유통시킨 것 같다. 중국이 언론의 자유를 노골적으로 탄압하는 독재국가이고, 저자의 배경이 관영 포털 칼럼니스트인 것을 고려하면, 이 책이 의도적인 프로파간다였음을 의심해볼 여지는 충분하다.
이 책을 읽고 관련된 책을 두 권 더 읽었다(웅크린 호랑이, 21세기 패자는 중국인가?). 과거에 읽었던 책들을 다시 들춰보기도 했다(아시아의 힘, 49가지 단서로 예측한 중국의 미래). 그래도 여전히 내 나름의 생각으로 명확하게 정리해내지 못하겠는 것을 보면, 서두에 적었듯 거시경제와 국제관계라는 현상의 본질이 너무도 복잡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난 아직 아는 것이 많지 않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생각의 바탕에 '회의주의'를 품고 있는 사람 그 누구라도, 이 주제를 확신에 찬 어조로 결정론적으로 설파하는 일은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적어도 아마도 나는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 같다.
생각을 마무리하며
계속해서 머릿속에 맴도는 생각이 있다. '국익'에 대한 구성원의 수혜, 그리고 구성원의 실질적 자유.
과연 누구를 위한 패권 다툼인가? 미국 우선주의, 중국몽의 수혜는 누가 받는 것인가? 레이쓰하이는 미국의 음모에 맞서 중국을 대국으로 일으켜 세우자는 프로파간다를 쏟아냈지만, 결국 경제 발전으로 얻은 부는 시진핑과 그의 측근들과 줄 잘 선 무리들에게 돌아가는 것 아닌가? 농지를 금융자산으로 바꾸자는 주장은 현재 중국이 처한 부동산 거품으로 현실이 되었지만, 그 과실은 누가 따먹고 위험엔 누가 노출되었는가? 레이쓰하이의 프로파간다는 공산당과 기득권 만을 향한 것이 아니다. 3억 명에 달하는 중국 농민공, 그보다도 못한 전근대적 삶을 살고 있는 변방의 빈민들까지를 향한다. '먹고살만할 때까지는 시황제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서 잘해보자'며 민족주의를 자극한다.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인 자유 같은 건 아직 요구할 때가 아니라며, 말 안 듣는 사람은 가차 없이 찍어낸다. 최근 글로벌 스타 배우 판빙빙은 소리소문 없이 사라져 생사조차 제대로 확인되지 않고 있고, 중국 최대의 IT기업 창업주 마윈은 석연치 않은 은퇴를 선언했다.
미국이라고 뭐 얼마나 더 나을까. 니얼 퍼거슨은 2011년 멍크 디베잇에서 '서방 체제의 도덕적, 기능적 문제가 이미 심각한 수준이므로 중국의 독재와 폐쇄성을 일방적으로 비난할 처지가 못된다'라고 지적했다(2011년 멍크 디베잇 'Does the 21th Century Belongs to China?' 링크). 사실이다. 현재 미국 사회의 빈부 격차와 불평등은 중국을 자랑스럽게 나무랄 처지가 못된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은 2월 8일 기자회견에서 "빈부 격차 확대가 미국에 가장 큰 도전"이라고 했다. 미국 우선주의의 과실은 중국몽에 비해 공정하게 분배되고 있을지는 모를지언정, 역시 문제가 많아 보인다. 구성원의 자유는 어떠한가. 전 CIA 요원 에드워드 스노든은 정보기관의 민간인 사찰이 광범위하고 무절제하게 일어나고 있음을 폭로하고 러시아로 망명했다. 미국 정부가 중국의 텐왕 프로젝트를 자랑스럽게 비난할 처지는 못 되는 것 같다.
이 생각을 더 밀고 나가면, 결국 정도의 문제라는 결론에 닿는다. 미국민이건 중국민이건 국부의 수혜를 공정하게 분배받지는 못하고, 실질적 자유 또한 제한되지 않는가. 그리고 중국은 미국을 비난할 때 이 논리를 적극적으로 써먹을 것이다. 이런저런 고민 끝에, 그래도 미국이 중국보다는 훠얼씬 낫지 않느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생각의 단초는 스노든과 마윈이었다...
스노든은 자신이 목격한 최상층부의 비리를 고발하고 타국으로 망명했다. 사람들은 인터넷과 책과 영화를 통해 그의 이야기를 알게 되고 정부를 비판할 수 있었다. 적어도 정부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대놓고 처벌을 받거나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간 사람은 없었다. 미국 정부와 정보기관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예전보다는 더 조심하게 되었을 것이다. 미국은 중국보다는 훨씬 더 '열린 사회'다
마윈은 중국 최대의 IT기업을 일군 기업가이지만 최근 돌연 은퇴 선언을 했다(기사 : 마윈, 은퇴 선언에 이어 알리바바 소유권까지 포기 링크). 정부에 밉보였기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하게 제기되고 있다. 중국은 독재권력에 밉보이면 최대 사기업의 총수도 이렇게 찍어낼 수 있다. 중국 인민들 중 웨이보에서 이런 얘기를 공개적으로 주고받는 사람들은 공안에 끌려갈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인터넷은 만리방화벽으로 차단되기 때문에 외부 세계에서 이 사건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도 알 수 없다. 중국민은 이렇게 조작되고 통제된 세계에서 살아간다. 독재권력은 인민들을 두려워하기는 커녕 마음껏 탄압한다. 조지 소로스가 중국을 열린 사회의 가장 큰 적이라고 성토하고 있는 건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중국은 현재 G2의 위상과 영향력에 비하면 형편 없는 수준으로 '닫힌 사회'다. 만에 하나라도 중국이 패권을 잡고 닫힌 사회의 영향력을 타국 사회에까지 행사하려 든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지만, 사실 이미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홍콩 우산 혁명을 기억해보라.
중국 친정부 인사들은 서구의 민주주의가 유일한 대안이 아니며, 중국의 문화적 특수성을 고려해 현재의 중국 정치 체제를 존중해줘야 한다고 한단다.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개소리라고 생각한다. 나한텐 그냥 이렇게 들린다. '중국이 세계 최강국이 되건 지금에 머무르건, 지금 권력을 잡고 있는 우리가 앞으로도 알아서 잘할 테니까 니들은 신경 꺼. 유능하고 잘난 우리가 국부를 키우고 나눠먹을 거고, 가난한 인민들은 밥만 배불리 먹여줘도 감지덕지할 거야'. 이건 분명히 개소리가 맞다.
투명한 비판과 의견 수렴 기능이 결여된 사회는 도덕적으로 명백히 나쁘지만 결과적으로도 결말이 좋지 않다. 눈과 귀를 닫은 사회는 필연적으로 멍청한 길을 가게 되어 있다. 과거 대약진 운동이 좋은 예다. 중국이 국제 사회의 일원이 되고 번영의 길로 가고자 한다면 현재의 체제로는 어려울 것이다. 이참에 미국한테 적절히 수술당하고 열린 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계기를 얻길 바란다. 중국 인민들의 실질적 자유가 개선되고, 그 결과 모두에게 더 나은 세상으로 한 발 더 나아가길 바라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