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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환 May 09. 2019

블랙 스완

세상에 일어날 수 없는 일은 없다


작년에 읽은 행운에 속지 마라 이후 두 번째로 읽은 탈렙의 책이다. 검은 백조는 나심 탈렙을 일약 스타로 만들어 준 유행어이기도 하다. 저자는 이 책을 '에세이'로 소개하는데, 실상은 철학과 문학을 포함한 인문학 전반, 과학, 경제학, 사회과학, 심리학 등 매우 폭넓고 깊이 있는 주제를 재치 있고 신랄한 문체로 적어내고 있다. 내용 요약이나 평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읽으며 느끼고 생각한 바를 정리하며 글을 적어본다.



1. 리스크


대중에게 알려진 사상가 중 저자만큼 리스크를 심도 있게 고찰한 사람은 아직 보지 못한 것 같다. 저자에 비하면, 리스크를 다룬 다른 작가는 대개 불확실성, 위험 등으로 두루 뭉실하게 리스크를 정의하고 주의를 잃지 말라고 당부하자는 수준이다. 탈렙은 리스크의 예측 불가능성, 현실이 되었을 때 종종 목도할 수 있는 결과의 파괴력까지를 심도 있게 고찰한다.


예측 불가능성과 파괴적 결과. 살아오면서 봐온 모든 백조가 흰색이었던 동물학자가 처음 검은 백조를 마주쳤을 때의 당혹감, 자신이 평생을 봐온 증거에 기반해 믿어왔던 세계가 뒤집히는 순간, 보다 보편적인 주제로는 전 세계가 둘로 갈라져 죽고 죽이는 전쟁, 혹은 자본주의 진영 전체를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는 금융위기 등등...


그런데 이걸 인식론적으로 고찰해보면 좀 더 오묘한 얘기가 된다. 어느 해의 추수감사절에 잡아먹힐 운명이었던 칠면조에게 자신의 죽음은 검은 백조 같은 사건이었지만, 칠면조의 목을 딴 도살자에게 그 사건은 검은 백조가 아니었다. 좀 더 곱씹어서 풀어써보면 다음과 같은 얘기가 되지 않을까.


검은 백조를 만나는 사람은 그 가능성을 0으로 일축하고 살아오던 무지몽매한 사람이다. 가능성을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결과를 마주했을 때 당혹스럽고, 그 결과의 파급효과에 대한 준비도 전혀 되어 있지 않다. 반면 세상에 '절대로 안 일어날 일이란 없다'는 점을 상기하는 사람은 검은 백조를 회색 백조로 바꿀 수도 있다. 그러니 가장 경계해야 할 태도는 자신이 다 잘 안다고 생각하는 '지적 오만'이며, 칠면조의 무지를 피할 수 있게 해주는 태도는 '지적 회의'다.



2. 통계학 무용론


탈렙은 수학, 통계학, 과학철학에 정통한 사람이다. 입담 또한 거침없어, 똑똑한 척하는 바보들을 신랄하게 씹어버린다. 그의 주된 공격 대상은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여럿을 포함, 정규 분포 기반의 통계학을 정규 분포가 아닌 위험한 세상에 마법처럼 갖다 붙이며 '신뢰할 수 있고 안전하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한 편 2019년 현재, 탈렙의 혹독한 비평 반대편에는 데이터 만능주의가 범람하고 있다. 빅 데이터니, 머신러닝이니, 인공지능이니 하는 말들이 유행어가 되어버린 세상이 아닌가. 개와 고양이 사진을 정확하게 분류하는 구글의 머신러닝 기술이 화제를 끌더니, 알파고가 이세돌을 꺾고, 중국 정부의 텐왕 프로젝트는 CCTV를 이용해 실시간으로 사람들의 안면을 식별하고 무슨 짓을 하는지 다 들여다보고 있단다.


재미있는 대비다. 나는 직업으로 데이터 분석을 하는 사람인지라, 탈렙이 신랄하게 비판한 정규분포와 선형 모형 기반의 통계 도구들을 많이 써오고 있다. 딱히 탈렙의 주장을 방어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도구는 그저 도구일 뿐이니, 문제에 맞는 도구를 언제든 찾아 쓰면 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정규 분포와 중심극한정리를 그럭저럭 신뢰할 수 있고 가성비도 나올 때면 그냥 쓰면 된다. 그게 안 먹힐 것 같을 때는 다른 도구, 다른 대안을 찾아 쓰면 된다. 숫자를 다루는 사람으로서 숫자에 문제가 있으니 아무런 숫자도 쓰지 않겠다고 하는 건 답이 되지 않는다. 월급 받는 사람으로서 밥값을 하기 위해서는 뭐라도 가져다 써야 된다. 그래서 가끔 시계열 예측 모형도 만들긴 한다고 하면, 탈렙이 싸잡아서 욕하는 사람의 하나가 되는 것인가. 뭐, 적어도 나는 내가 만든 시계열 예측 모형을 그대로 믿어도 된다고는 말 안 한다(나도 안 믿는다...)



3. 바벨 전략


탈렙은 검은 백조에 강건할 수 있는 포트폴리오로 85%의 안전자산, 15%의 위험자산을 권한다. 탈렙의 포트폴리오에서 15%의 위험자산은 세상이 망할 때 큰돈을 버는 풋옵션이라고 한다. 85%는 미국채 수익으로 저위험의 수익을 만들어 내고, 운영 경비를 제외하고 남는 수익으로는 계속해서 풋옵션을 사는 전략일까. 전부터 하던 생각인데, 이건 굴리는 돈의 단위가 엄청 커야만 할 수 있는 거다. 국채 수익률로 고연봉자들 연봉 주고 남는 돈으로 풋옵션을 계속 사서 포트폴리오의 15%로 보유하려면, 대체 국채를 얼마치 가지고 있어야 된다는 얘기인가...


탈렙처럼 특수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아닌 나 같은 평범한 월급쟁이라면, 탈렙의 바벨 전략도 오히려 조금 다르게 생각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해봤다. 앞으로 꽤 장기간 큰 수준은 아니지만 안정적인 현금흐름을 꾸준히 뽑아낼 수 있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라면, 자신이 직업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과 지속 기간이 곧 포트폴리오의 안전자산 85%가 될 수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삶의 다른 부분에서 레버리지를 크게 키우지 않는 선에서, 유동 자금은 모두 위험 자산에 투자를 한다고 해도 그리 크게 위험한 일이 아닐 것이다. 검은 백조를 회색 백조로 만들기 위한 겸허한 태도를 항상 유지한다면 반대 매매를 당할 가능성도 그리 높지는 않을 것이 아닌가(이건 대체 무슨 소리인가...)



4. 철학과 스타일


불확실성을 극도로 경계하고 위험을 극도로 회피하는 탈렙의 투자 철학은 바벨 전략이라는 스타일로 구현이 되었다. 탈렙과는 다르지만, 위험 회피와 분산의 원칙은 다른 유명한 대가들의 철학과 스타일에도 반영이 되어 있다. 기억나는 대가들의 철학을 곱씹어본다...


'분산 포트폴리오'의 원리는 포트폴리오의 구성 자산을 상관계수가 낮은 것들로 나눠서 채우라는 얘기다. 레이 달리오도 이를 강조한 바 있다. 아마 탈렙이라면 레이 달리오의 계량적 접근, 시스템화 된 투자 전략도 검은 백조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언제건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고 하지 않을까.


피터 린치는 포트폴리오를 주식 100%로 채웠다. 그중에서도 꽤 높은 비중을 '10루타 종목'의 후보군 여러 종목으로 분산해서 채웠다. 운용역으로의 실적으로만 치면 린치는 투자업계의 전설로, 탈렙은 근처에도 가지 못할 것이다.(그러고 보면 탈렙도 실적 좋은 대가들을 까지는 않았다. 못 깐 것일까...)


필립 피셔는 위험의 분산이 필요하다는 명제 자체를 거부했을 것이다. 아마 블랙 스완 같은 건 알 수 없는 일이니 그냥 무시하고 기업 자체에 집중하라고 일축했을 것 같다...



생각을 마무리하며


좀 뜬금없지만, 탈렙이 지어낸 가상의 인물 예브게니아의 사례에서 무언가 영감 같은 것을 얻었다. 자기 뚝심대로 글을 써나간 결과 아무도 모르던 무명의 아마추어에서 스타 작가로 대성공한 인생 역전 스토리. 탈렙의 표현대로, 이 또한 블랙스완이다.


최근 바보 같게도 글쓰기에 대한 고민을 잠시 했었다. 내가 쓰는 글은 사람들이 쉽게 읽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결국 또 내 세계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아마 브런치북 프로젝트에 공모했다 고배를 마신 것도 한 몫했을 것이다. 예브게니아라는 인물의 이야기를 통해 이런 나의 멍청함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너무도 당연한 얘기지만, 남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쓰는 글쓰기 따위가 남의 마음을 설득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뚝심 있게 자기 철학과 스타일을 만들어 나가도 뭔가 제대로 된 거 하나를 만들어낼까 말까 한 짧은 인생인 것을.


나는 나름대로 노력하며 충실히 살고 있다. 방어 포지션은 직업 세계에서, 공격 포지션은 자산 시장에서 구축하고 있다. 삶의 포트폴리오가 쉽게 무너지진 않을 것이다. 그러니 글쓰기만큼은 그냥 온전히 스스로의 의지에 집중해서 써도 좋을 것이고, 또 그 편이 어느모로건 성공 확률도 더 높을 것이다. 그냥 쓰고 싶은 대로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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