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추석엔 홍콩과 대만에 간다. 그저께 아침 사무실에서 인천 발 홍콩 행, 홍콩 발 타이베이 행, 타이베이 발 인천 행 다구간 항공권을 결제했다. 다소 충동적으로 결정한 것 같기도 하다만, 지나고 나서 마음이 편한걸 보니잘한 것 같다.
지난 주말엔 속초에 가 있었다. 밤늦게까지 술잔을 기울이며 나의 다음 여행지를 어디로 할 것인지를 두고 한참을 얘기했다. 금요일 밤엔 완이형이 캄차카 반도로 떡밥을 던졌고, 토요일 밤엔 지은이가 이집트를 밀었다. 귀가 얇은 나는 첫째 날엔 캄차카 반도에 끌렸고 다음 날엔 이집트에 혹했다. 서울로 돌아와 며칠간은 이집트 여행 경로와 교통편, 다이빙 등을 검색해보고 있던 차였다.
티벳, 캄차카 반도, 이집트를 고민한 끝에 홍콩과 대만이라니. 인간의 상상력은 참 자유롭구나. 그런데 한 편으로 생각해보면 나로서는 매우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던 것 같다.
내가 속초에 가있던 지난 주말, 홍콩에선 범죄인 인도법 개정에 반대하는 대대적 시위가 있었다. 그야말로 역대급 규모로, 100만 명이 모였던 시점에 인도법 개정을 강행하던 캐리 람 행정장관은 꼬리를 내리며 대국민 사과를 했다. 그러나 성난 시위대의 기세는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다. 시위대는 캐리 람 장관의 사임과 인도법 전면 폐기를 주장하고 있으며, 규모는 200만 명으로 커졌다(기사 링크). 심지어 한국에 유학 중인 홍콩, 중국 유학생들 사이에서도 갈등이 빚어지고 있다고 한다(기사 링크).
속초에 있던 우리도 저녁을 먹으며 홍콩 얘기를 아주 잠깐은 했다. 민주주의, 자유, 독재 등에 대한 얘기를 아주 자암깐 하고 캄차카 반도 얘기로 넘어갔던 것 같다. 서울로 돌아와 이집트 행 항공권을 검색하면서도 홍콩 뉴스를 계속 접했는데, 며칠간은 그저 보고 있었을 뿐이다. 특파원이나 종군 기자 마냥 그 혼란의 소용돌이에 직접 뛰어들어 사진을 찍고 글을 쓰고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불과 며칠이 지나고는 그런 비슷한 행동, 그 혼란의 소용돌이에 찾아가 발로 걷고 사람들을 만나고 사진을 찍고 글을 쓰는 등의 행위를 해보고 싶어졌다.
개인적으로 작년, 그러니까 2018년부터 시작된 미중 무역 분쟁, 그 기저에 깔린 초강대국 간 패권 경쟁, 그 이면에 깔린 이념과 철학과 의미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작년에 이 주제에 대한 책을 몇 권 읽으며 많은 생각을 했다(G2전쟁 글 링크). 공부를 더 하고 더 알고 더 깊게 생각해보고 싶은 욕구가 많이 쌓여 있던 차였다. 그래서 과거 자신들을 식민 통치했던 영국 정부의 국기 유니언 잭을 흔들어 대는 홍콩 시위대의 모습, 여기에 자극을 받아 반중파가 세를 얻고 차이잉원 총통이 차기 대권 주자로 다시 힘을 얻는 대만의 상황을 보니 그냥 먼 나라 얘기처럼 느껴지지만은 않았다. 나에게 지금 홍콩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태는 지금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온갖 갈등과 모순의 결정체이자, 강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인 것이다.
다구간 항공권 발권의 마지막 트리거는 김영하 작가였다. 출근길에 펴 들은 신간 '여행의 이유'에 나를 위한 마지막 떡밥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책은 여행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담은 에세이로, 총 9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작가가 최근 중국 여행에서 추방되었던 일화와, 그보다 한참 전 학생운동하던 시절 재벌기업들의 지원을 받아 안기부 직원과 형사를 대동하고 중국으로 단체여행을 다녀온 일화를 담고 있다. 작가가 재벌기업들의 지원을 받아 중국으로 단체 여행을 갔던 것은 천안문 사태로부터 반년, 베를린 장벽 붕괴 후 한 달 정도 뒤였다는 것으로 보아 대략 1990년 즈음이었던 것 같다.
80년대 말~90년대 초 당시 한국의 분위기에 대한 상상과 함께, 작가의 묘사를 더듬으며 내가 느낀 내용을 적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 사회주의 몰락과 운동권 학생의 좌절, 그런 운동권 학생들에게 '세상 물정 좀 보고 오라'며 여행비를 지원해주는 아량을 베풀었던 재벌기업들, 실낱같은 희망처럼 간직하고 있던 사회주의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북경대 학생과의 대화에서 부정당했던 작가의 경험, 운동권 학생과 정보과 형사 간의 인간적 교감, 그 우연한 인연 덕에 훗날 잡혀갈 인연을 피할 수 있었던 작가의 행운, 삶의 모순과 불확실성 등.
책 내용이 궁금한 분께는 일독을 권한다. 얇고 재미있고 적당하게 무게감도 있고 생각할 거리도 던져주는 책이라 생각한다.
여하 간에 이제 나에게 중요한 사실은 9월 6일 ~ 14일 비행기 표를 끊었다는 것이다. 이제 가기 전까지 중국, 홍콩, 대만의 현대사와 문화를 공부하면서 슬슬 준비를 해봐야겠다. 첫 책은 '헨리 키신저의 세계 질서'. 이 책은 중국 현대사를 다룬 책은 아니지만, 더 큰 틀에서 국제 정세를 풍부하게 조망할 수 있는 책이라 현재 홍콩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