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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윤 Dec 25. 2023

[이방인의 일기 : 캘거리] #19

인연(因緣)




일주일 전 어머니의 날 매니저가 자리를 마련해 주었던 덕분에 촬영과 더불어 어르신들과 첫 만남을 가질 수 있었던 남자는 수요일 오전, 이전 미팅 때 구상했던 계획들을 본격적으로 진행하기 위해 다운타운 끄트머리에 위치해 있던 차이나타운으로 향했다. 10시 30분에 딱 맞추어 빌딩 앞에 도착한 그는 이미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매니저를 만나 곧바로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고, 그들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서 숫자 11이 쓰여 있던 버튼을 눌렀다. 



왼편의 기다란 복도 중간 즈음에 있던 집 앞에 멈춰 초인종을 누른 그들은 곧이어 안에서 나오는 한 어르신을 마주했다. 전에 뵀었는데 기억이 안 나면 어떡하나 싶었지만 유독 밝고 쾌활한 성격을 가지고 계셨던 그분을 보자마자 단번에 알아차리고서 그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렇게 셋은 집 안으로 들어섰고, 남자가 집을 둘러보며 촬영에 대해 구상을 하는 동안 그들은 계속 중국어로 대화를 나눴다. 잠시 뒤 매니저는 자신이 오늘 다른 일정이 있어 계속 같이 있을 수 없으니, 나중에 촬영이 마무리되면 이 번호로 연락을 달라고 부탁하며 집을 나섰다. 







그렇게 4평 남짓 되었던 공간 안에 남게 된 남자와 노년의 여성은 촬영에 들어가기 전, 서로 원활한 소통을 가능케 할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그는 우선 자신의 스마트폰에 설치되어 있던 번역기 앱을 통해 테스트 삼아 간단한 인사 문구를 번역해 보여주었고, 그녀는 대략적으로 어떤 의미인지 이해했다는 뉘앙스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남자는 자신이 원하는 사진과 당신이 원하는 사진을 모두 찍고 싶다는 문장을 새로이 입력해 보여주었는데, 내용을 읽자마자 어르신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에서 몇 개의 그림들을 들고 거실로 나왔다. 느낌상 자신이 그린 작품들과 같이 찍어줬으면 좋겠다는 것 같아 그는 카메라 전원을 켜서 소파에 그림을 들고 앉아있는 그녀를 첫 장면으로 스타트를 끊었다.



이런 형식의 인물사진을 찍어본 적이 없었던 탓에 다소 애를 먹기도 했지만, 반대로 그런 점으로 인해 조금 더 자연스러운 사진들이 나오기도 했다. 전형적인 포트레이트 보다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찍어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던 매니저의 입장에는 잘 부합할 것 같았던 장면들이 조금씩 쌓여갔고, 어느 정도 분량이 확보된 후에 그들은 잠시 식탁에 앉아 쉬면서 앞에 놓여 있던 과일들을 집어먹었다. 







잠시 뒤 누군가가 문을 노크한 뒤에 잠겨있지 않은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바로 옆집에 살고 계셨던 또 다른 할머니였고, 웃으며 그녀와 남자에게 인사를 한 그녀는 비어있던 의자에 바로 자리를 잡았다. 손에 작은 기기를 들고 계셨었는데, 그곳에 입을 대고 중국어로 말을 하자 잠시 뒤, 영어로 번역된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친한 친구예요. 사진을 같이 찍고 싶어요."



아까와 같은 방식으로 30분 정도 전형적인 장면과 자연스러운 컷들을 찍고 나서 'Finish'라는 단어를 뱉으며 양팔을 뻗어내는 제스처를 보인 그의 모습에 그녀들 또한 'Thank you'라는 단어로 대답했다. 두어 사람이 더 남아있다며, 우리가 같이 그들의 집으로 안내해 주겠다는 문장을 듣고 나서 그는 짐을 챙겨 다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또 다른 집의 문을 두드렸다.


 



 


이전에 뵈었던 분들과는 다르게 큰 풍채를 가지고 계셨던 어르신이 그들을 반겼고, 자신의 집이 훨씬 깔끔해서 찍기 편할 거라며 그녀는 호탕한 웃음과 함께 농담을 던졌다. 구조가 크게 다르지 않았기에 비슷한 구도와 세팅으로 곧바로 촬영을 시작했다. 자신의 큰 키를 최대한 다 담아달라는 그녀의 요구대로 집 장식품들과 잘 어울리는 공간에서 여러 장을 먼저 찍고 나서 그는 벽에 걸려있던 그녀의 사진을 가리키며 번역된 문장을 보여주었다.




"이 사진 정말 좋네요. 같은 자세를 취해줄 수 있나요?"



그녀는 바로 소파에 앉아 웃으며 팔짱을 꼈다. 서너 번 정도 셔터를 누르고 난 뒤에 사진을 확인하고 OK 사인을 보내자 하고 싶은 말이 있으셨는지 옆에 있던 이웃의 번역기를 빌려 그에게 건넸다. 



"저 사진은 내가 일본에서 유학할 때 찍은 거야. 자네와 비슷한 나이 때 찍은 사진과 같은 포즈를 50년이 지난 지금 캐나다에서 다시 찍게 됐네. 인생은 정말 알 수가 없단 말이지!"




옆쪽 주방에서 점심을 준비하고 계셨던 두 할머니는 이제 그만하고 식사를 하자며 그에게 젓가락을 입에 넣는 표시를 보였다. 아침을 꽤나 많이 먹고 왔던 탓에 그렇게까지 배가 고프지는 않았지만, 얼마나 더 촬영을 해야 할지 몰랐기에 그녀들과 함께 식탁에 앉았다. 한국에서 보았던 비슷한 모양의 물만두와 구기자와 얌을 함께 넣어 끓인 연한 국물, 그리고 빨간 양념으로 버무려진 두어 가지의 밑반찬들을 놓고 사람들은 같은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그의 가느다란 팔뚝을 가리키며 식사가 끝날 때까지 'eat'을 외쳤던 어르신들. 어쩌면 자신의 손주들에게 하나라도 더 챙겨주고 싶어 하는 마음과 비슷한 느낌이 드셔서 계속 그렇게 말씀을 하셨던 게 아니었을까?







설거지까지 모두 끝마치고 나서 그들은 바로 옆집에 살고 계셨던 할아버지를 찾아뵈었다. 서예가 취미셨던 이 분은 거실 한편에 별도로 작업대가 놓여 있을 정도로 매일같이 작품들을 만들고 계셨는데, 그에게 과정을 보여주겠다며 옆에 놓여있던 붓에 먹을 조금 묻혀 종이에 한자를 써 내려갔다. 자신이 좋아하는 물건들은 전부 이곳에 올려놓는다고 하셨던 말씀에 남자는 이 공간을 기준으로 여러 사진을 찍은 뒤 이 날의 모든 촬영을 마무리했다.



자리에 계셨던 모든 분들에게 인사를 하고 1층 로비로 내려온 남자는 매니저를 만나려 했지만 그는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어쩔 수 없이 아까 넘겨받은 번호로 문자를 하나 남기고 나서 그는 나오지 않으셔도 된다는 말에도 불구하고 굳이 빌딩 밖으로 나와 배웅을 하길 원했던, 이 날 시작부터 끝을 함께 했던 할머니와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다시 와서 촬영을 할 계획인가요?" 



그녀의 문장을 듣고서 그는 기기에 말을 한 뒤에 다시 그녀에게 건넸다. 



"매니저가 원하면 한두 번 더 올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인 뒤에 잘 가라며 손을 흔들었다. 10시 30분부터 시작된 촬영은 오후 4시가 되어서야 끝이 났고, 그는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곧 있을 며칠간의 여행에 필요한 차량을 위해 렌터카 업체에 견적을 물어보려 캘거리 타워가 서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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