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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윤 Feb 21. 2024

[이방인의 일기 : 캘거리] #37

경계선





알람은 새벽 4시와 4시 15분에 각각 맞추어져 있었지만, 생각보다 강했던 한기로 인해 몸을 계속 뒤척였던 그는 2시간 여 정도 선잠을 자고서 결국 3시 30분쯤 몸을 일으켰다. 도저히 더 이상 잠에 들 자신이 없어 설정해 놓았던 알람을 모두 해제한 그는 눈을 몇 번 비비고 나서 김이 잔뜩 껴 있던 창문을 내려 밖을 확인했다.



빗방울은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더 쏟아지기 전에 자리를 정리하는 게 낫겠다 싶어 곧바로 신발을 신고 시트를 다시 들어 올린 뒤 썼던 담요를 접어 캐리어에 집어넣었다. 경로 중에 있던 프랜차이즈 카페가 새벽 5시부터 문을 열어서 그 시간 동안 무얼 하며 시간을 보낼까 고민했던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국인 친구들과 같이 사용하고 있던 메신저 앱을 켰다. 한동안 서로 바빠서 연락하기 힘들었던 그들이었지만 이때가 한국의 추석 연휴 기간이었던 터라 많은 친구들이 접속해 있었고, 한창 떠들고 있던 그들의 대화 속에 남자는 불쑥 끼어들었다.



"뭐야 형 왜 지금 시간에 들어와..?" 


"차에서 자다가 너무 추워서 지금 일어났어.. 카페 문 열려면 조금 기다려야 해서 들어와 봤다." 


"이번엔 또 어딜 가길래 차박까지 했어?"


"동쪽 앨버타 주의 경계가 있는 곳까지. 200km 넘게 운전해야 하는데 잘됐다. 너네랑 떠들면서 가면 덜 지루하겠다."







5시 정각이 되자마자 카페로 들어선 그는 라지 사이즈의 블랙커피를 구매한 뒤에 몇 번을 홀짝거리고 나서 고속도로로 차를 몰았다. 인적이 드물거나 혹은 아예 버려져 있던 장소들을 찾아가는 게 주된 목적이었던 이 날이었기에 그가 가는 방향으로 함께 나아가는 차량은 단 한 대도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10분이 조금 안 돼서 비는 억수로 쏟아졌고, 가로등 하나 없는 왕복 2차선 도로에서 그는 혹시나 튀어나올지도 모르는 야생동물들 때문에 이전에 갔었던 여행들과는 차원이 다른 긴장감과 집중력을 가지고 핸들을 꽉 쥐었다. "혹시나 신호 끊기면 사고 난 줄 알아라."라고 우스갯소리로 친구들에게 말했던 그였지만, 하늘이 온전히 밝아지기 전까지 달렸던 그 1시간 반 동안의 운전은 여태껏 느껴보지 못했던 두려움의 연속이었다. 



다행히 별문제 없이 도착했던 첫 번째 장소. 이곳에 도달하기 10km 남짓 남았을 때부터 통신 강도가 약해지더니 결국 완전히 끊긴 상태가 되었고, 그가 그토록 달리기 싫어하는 자갈들로 둘러싸인 비포장도로를 한참 달리고 나서야 한 버려진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주변에 민가를 몇 개 제외하고는 이 것 하나 달랑 세워져 있던 곳이었지만, 나름 지도 앱에서는 위치를 '관광 명소'로 표기하고 있었다. 계속해서 부슬부슬 떨어지는 비 때문에 한 손에는 우산, 다른 한 손에는 카메라를 쥐고 사진을 찍는 게 꽤나 피곤한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이 장소를 대충 찍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차에 돌아와 자그마한 LCD 화면으로 체크를 하고 다시 셔터를 누르는 작업을 반복하며 마음에 드는 컷이 나올 때까지 계속 시도를 했던 그였다. 



어지간히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굳이 이 먼 곳까지 찾아와 사진을 찍어야 하나 라는 의문이 들겠지만, 항상 신선한 장면들을 마주하기를 원했던 그의 성격에는 꽤나 멋들어진 장소였다. 이전에 마주쳤던, 비슷한 감정이 들었던 곳들이 더러 있었음에도 이곳은 그런 분위기의 극에 있는 듯했다.(어쩌면 이전에 뚫고 왔던 험난한 경로 때문에 더 그랬던 걸지도..?)







그렇게 다시 또 한참 도로를 달리고, 우리나라로 치면 '읍' 보다도 작은 단위의 마을들에 멈춰 잠시동안 사진을 기록해 가며 그는 동쪽으로 나아갔다. 같은 배경만을 가지고 있는 텅 빈 도로를 하염없이 운전하는 것이 졸음을 유발할 법도 했지만, 일찍이 들이켰던 커피 속 카페인의 효과가 상당히 강력했는지 충혈된 두 눈과는 다르게 정신은 상당히 말똥말똥했다. 당연하게도 이 날 그가 찾아갔던 모든 장소들에서 마주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고, 그나마 한 마을에서 사람의 손길이 그리워 그를 따라다니던 들개 2마리가 그를 반겨주었던 유일한 벗이었다. 



거주민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세 가구 정도가 최대치였지만 아직까지도 몇몇 사람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대부분 1920년대 때부터 꾸려진 마을들이었고, 이미 수많은 이웃들이 이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두고 간 흔적들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이런 것들을 기록하고자 했던 것이 이번 여행의 궁극적인 목적 중 하나였는데, 며칠 전부터 급하게 추가적인 장소들을 찾은 것 치고는 꽤나 타율이 좋은 편이었다. 이미 많은 작가와 포토그래퍼들이 거쳐갔던 발자취를 뒤따라가는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내가 직접 했다.'라는 것에 조금 더 초점을 맞추어 봤을 때는 이 또한 꽤나 의미 있는 여정임이 분명했다.







'이 위치까지가 앨버타 주입니다.'라는 표지판을 지나치고, 계획했던 마지막 포인트를 거쳐 다시 차를 돌려 하룻밤 묵을 숙소 프런트 앞에 주차를 하니 시간은 저녁 6시를 지나가고 있었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빗줄기에 옷을 약간 적시고서 문을 열고 들어간 남자는 데스크 앞에 있던 필리핀계 남자에게 피곤함이 섞인 웃음을 띠며 예약확인서를 보여주었다. 이름을 확인하고 나서 한국사람이냐는 물음을 던졌던 그는 맞다는 대답에 자기 가족이 요즘 한국 드라마에 빠져 살고 있다는 말과 함께 호쾌한 웃음을 보이며 104라는 번호가 쓰여 있던 키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체크아웃을 따로 알릴 필요 없이 키만 방에 두면 된다는 사장의 말을 뒤로하고 밖으로 나온 그는 차를 다시 자신의 방 앞에 갖다 대고 곧장 짐들을 옮긴 뒤에 샤워를 했다. 전날 차박을 하면서 양치만 겨우 했던 몸상태에 비를 맞다 보니 그 꼴은 말이 아니었다.




새벽이 돼야 비가 그칠 거라는 날씨 예보에 그는 욕심을 내려놓고 저녁을 해결하기 위해 지갑과 차키만을 챙겨 얼마 안 가 다시 방을 나섰다. 메뉴는 전날과 같이 햄버거와 감자튀김이었지만, 이 날 온전히 먹었던 첫 번째 식사라는 것에 더해 잘 도착했다는 안도감이 섞여 어떠한 불평불만 하나 없이 즐길 수 있었다. 정신은 계속 깨어있었지만 뻑뻑해진 두 눈 때문에 노트북 모니터를 바라보는 것조차 힘겨웠던 그는 밤 9시가 되기 전부터 침대 이불속으로 들어갔고, 설정된 알람들을 확인하자마자 곧바로 옆에 있던 작은 랜턴을 끄고 잠에 들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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