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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윤 Feb 21. 2024

[이방인의 일기 : 캘거리] #38

Canadian Version of Route 66 Trip




전날의 쌓였던 피로의 여파였을까? 방에서 계속 들렸던 히터의 털털거리는 진동과 화장실 배관의 물 흐르는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남자는 알람이 울릴 때까지 죽은 듯 잠에 빠져있었다. 이럴 것을 예상하고 5분 단위로 2개의 알람을 추가로 맞추어 놓았던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영상 2도를 표시하고 있던 현재 날씨를 확인하고 나서 그는 의자에 걸쳐 놓았던 옷들을 다시 주섬주섬 입고 밖으로 나섰다. 전날의 예보대로 비는 그쳐 있었고, 잔뜩 고여있던 물웅덩이들과 함께 도로의 수많은 가로등과 모텔의 간판이 비몽사몽 한 그를 맞이해 주었다. 







그가 굳이 새벽 3시에 지친 몸을 이끌고 거리로 나온 이유는 한 가지였다. 앨버타 주와 서스캐처원 주의 경계에 놓여있던 이유에서였는지 이 동네 주변에는 수많은 모텔들이 자리하고 있었고, 오래전부터 사용하던 독특한 디자인을 가진 간판들의 불이 들어와 있는 장면을 촬영하고 싶었던 것. 이전 여행에서 목격했던 불그스름한 빛이 상당히 인상 깊었던 것 때문에도 그 기록의 연장선으로 가져가고 싶다는 마음과 동시에 최근에 보았던 한 작가의 사진집에서 받았던 영감이 섞여 탄생한 아이디어였다.



그러나 그런 그의 계획은 10분도 안 되어서 모두 어그러졌다. 예상과는 다르게 목표했던 모든 간판들의 불이 꺼져 있었다. 너무 늦게 나왔던 건지, 아니면 연식이 오래되어 이제 더 이상 사용을 안 하는 것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찬 기운에 잠은 모두 달아났고, 전날 내내 그를 괴롭혔던 비도 오지 않는 지금의 시간이 아쉬웠기에 차에 시동을 걸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근방의 다운타운으로 향했다. 1시간 동안 마음에 든다 싶었던 장소에 잠시 차를 세운 뒤 사진을 찍고서 그는 다시 방으로 돌아왔고, 곧바로 옷을 벗어놓은 뒤 애매하게 남아있던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잠을 청하기 위해 침대에 몸을 뉘었다. 







9시가 되어서 다시 눈을 뜬 남자. 새벽에 일어났을 때와는 다르게 피로가 배로 몰려와 그를 압박했지만, 아무리 이전 날들에 비해 여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날도 가야 할 곳들이 많았기에 그는 7초를 마음속으로 카운트하고 나서 몸을 일으켜 화장실에 달려있던 샤워꼭지를 돌렸다. 11시 까지였던 체크아웃 시간을 다 채우지 않고 10시가 조금 안되어 숙소를 떠난 그는 계속해서 남아있던 아쉬운 마음에 몇 시간 전 놓친 무미건조한 모텔들의 간판들을 담고 나서 다시 중심지로 향했다. 한 친구가 이전에 언급했던 대로 캘거리와 같이 다양한 벽화들이 곳곳에 그려져 있었지만, 흐리멍덩한 날씨와 텅 빈 거리가 함께 담긴 장면들은 화려한 느낌보다는 오히려 삭막한 분위기가 더욱 짙게 풍겼고, 이런 장면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남자는 얼마 안 가 동네에 작별인사를 고했다.







중간에 휴게소에 들러 아침 겸 점심으로 미니도넛 한 세트와 블랙커피를 사들고 차에 올라탄 그는 70km 정도 일직선으로 쭉 나 있던 고속도로를 달리며 간단히 끼니를 해결했다. 그 후로도 30여 분 더 걸려 도착한 새로운 마을 또한 요 며칠간 숱하게 보아왔던 'HOTEL' 사인의 건물이 우두커니 세워져 있었다. 모두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일전에 자료들을 조사하며 봤을 때 이런 건물들은 최소 50년은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고, 현재 부지를 판매하고 있거나 이미 철거가 완료된 곳들 또한 상당수였다. 이 장소에 막 도착했을 때만 하더라도 남자는 여타 다른 곳들처럼 터만 남아있는 것으로 착각이 들 만큼 주변 상태는 매우 닳아 있었다. 하지만 그 오해는 잠시 뒤 건물에서 한 직원이 나오면서 금세 바뀌었다.



"저희 계속 운영해요. 이 건물 100년 넘은 건 알았어요?"


"100년이요?! 그 정도일 줄은 전혀 몰랐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같은 반응을 보여요. 내일 문을 닫아도 이상하지 않은 것도 맞고요." 



스마트폰 카메라가 도처에 널려있는 지금 굳이 이런 류의 기록을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의미가 있겠나 싶기도 했지만, 청개구리처럼 이런 테마들에 더욱 눈길이 갔던 그였기에 지체하지 않고 다시 캘거리를 떠났던 그는 이 사이에 아주 작은 확률로 만나는 인연들과 이야기로 완성되는 게 결국 사진이고, 다큐멘터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하곤 했다. 괜히 수많은 대작가들이 Visual 'Storytelling'을 강조하는 게 아닐 것이고, 모두가 포토그래퍼인 이 시대에 특이점을 만들어내려면 이 부분에 많은 고민을 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나 싶기도 했다. 







이후 다음 장소에 가까워질 때 즈음부터 날씨는 맑아지기 시작했다. 전혀 기대하고 있지 않았던 상황에 재수라고 생각했던 그는 여러 마을들에 들렀고, 앞선 이틀 동안 카메라 렌즈에 튀었던 물방울을 닦아내야 하는 번거로움 없이 이날은 모처럼 마음 편하게 카메라를 목에 걸고 다닐 수 있었다. 20 컷 정도 남아있던 필름카메라 또한 계속 그의 곁에 함께 했다. 미리 찾아놓았던 장소는 세 군데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마을과 마을을 넘어가는 중간 이정표에 표시된 다른 마을들이 있으면 주저 없이 그곳에서도 차를 세웠다. 좋든 나쁘든 플랜 A에서 벗어나는 여행을 마지막 날까지 했던 셈인데, 한 가지 흥미로웠던 점은 이번 여행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사진들의 대부분이 이런 우연찮게 마주쳤던 장소들에서 찍었던 것들이었다는 점이었다.







날씨가 계속 이렇게 화창했다면 여행 첫날 첫 번째 장소로 왔을 곳에 가장 마지막으로 도착한 남자는 작은 공원에 차를 대고 마을 입구 쪽으로 걸어 나왔다. 총 3일간의 발걸음 중 알파이자 오메가라고 여겼던 커다란 모텔 사인 앞에 잠시 멈춰 빛의 방향을 확인하고 카메라를 꺼낸 그는 적당한 노출값을 맞추고 난 뒤에 여러 차례 셔터를 눌렀다.




미국 66번 도로에서 찍힌 수많은 사진들과 그나마 가장 비슷하게 보였던 장면을 끝으로 남자의 2023년 여행은 모두 막을 내렸다. 캘거리라는 도시 안에서만 이루어질 줄 알았던 그의 기록은 결국 앨버타주의 동서남북 모든 방향으로 확장된 채 결말에 가까워져 갔고, 그 덕분에 그가 상상했던 일정 수준의 한정적인 모습들보다 훨씬 더 다양한 장면들을 가지고 한국으로 돌아갈 수가 있게 되었다. 남자가 먼저 행했던 사람들에 의해 용기를 얻어 이번 여행을 시작했듯, 다른 이들 또한 그의 사진들을 보고 뒤를 밟기를 희망하며 그는 서서히 저물어 가는 태양을 뚫고 캘거리에 가까워져 갔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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