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색하면서도 흥미로웠던 코카서스 3국 유랑기
퇴근시간이 조금 지난 평일 저녁, 거실은 평소와 다르게 북적거렸다. 이제는 익숙해질 법하면서도 쉽게 가까워지지 못하는, 긴장과 설렘이 적당히 버무려진 기운이 다시 집 안을 조금씩 채워나가고 있었다. 일본 여행 때 사용했던 캐리어 2개는 먼지가 두둑이 쌓이기도 전에 다시 바닥에 누워 나와 엄마의 물건들을 넘겨받았고, 두어 시간 동안 필요한 것들을 다 챙긴 뒤 재차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꼭 집을 나서기 직전에야 기억이 나는 어떤 한 가지에 대한 우려 때문에 우리는 다음 날 오후에 벌어진 지퍼를 닫자고 합의를 하며 각자의 백팩과 손가방으로 시선을 바꿨다.
기내에 같이 들어가도 걸리적거리지 않을 크기의 검은색 가방 가장 아래 공간에는 디지털카메라와 배터리 2개, 그리고 충전기가 먼저 자리를 잡았다. 필름카메라를 챙기지 않는 게 상당히 어색했지만 하필이면 이때 사진적으로 머리가 복잡했기에 최대한 단출하게 가지고 가는 게 맞다고 판단했다. 사진이라는 존재는 늘상 나에게 오르막과 내리막을 예상치 못한 시기에 툭하고 무심하게 던져준다. 인생 또한 그런 게 아니겠냐만 서도 가끔은 그 빈도가 너무 심하다고 하소연하고플 때가 종종 있다. 고점은 잠깐이지만, 저점은 한번 붙으면 지독하리만치 긴 시간 함께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 매일같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야 하는 일정이 합쳐지면 정신이 없을 것이 분명했으므로 선택과 집중은 어찌 보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그리고 이 결정은 결과적으로 매우 성공적이었다.) 항상 내 등에 업혀있던 카메라 가방과도 이번에는 잠시 작별을 고했다. 알맞은 크기일 거라 생각하고 먼저 세팅을 해 보았지만 고지대로 갈수록 변덕스러워지는 날씨로 인해 그에 대한 대비책들을 하나둘씩 욱여넣다 보니 이 친구도 나중에는 두 손을 들었고, 결국 다시 백팩으로 옮겨 담을 수밖에 없게 됐다.
10여 일 정도 되는 일정과 더불어 살면서 몇 번 들어보지도 못했던 나라들을 방문한다는 것은 이곳저곳을 많이 다녀 본 나의 입장에서도 그리 달갑게만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전처럼 사전 조사를 해볼까도 했지만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아 결국 '그냥 부딪혀보자'라는 심정으로 결론을 지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부분이 꼭 나쁘게 적용되지만은 않았다. 중동 갈등으로 인해 매일같이 뉴스에서 쏟아져 나오는 두려움 가득한 소리들을 추가적인 노력 없이 걸러낼 수 있었다는 점은 꽤나 긍정적인 부분으로 다가왔으니까. 지리적으로 이란과 맞닿아 있었다는 것을 여행이 끝나고 나서야 알았다는 게 남들이 봤을 때는 정말 모자란 소리 같이 들리겠지만, 어찌 되었건 이 덕분에 나는 여러 곳에서 넘어와 허리춤에 혹처럼 붙어있던 쓸데없는 걱정 중 하나를 떼고 시작할 수 있었으니, 조금은 괜찮은 스타트를 본인조차도 모르게 끊었다고 봐도 괜찮았을 것이다. 물론 당시에는 10시간 정도 되는 비행을 어떻게 잘 해결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그 무엇보다도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었지만.
새벽 1시가 되어서야 하늘로 발을 떼는 비행 편이었음에도 우리는 상당히 이른 시간인 저녁 8시에 딱 맞춰서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집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바에야 일찍 가서 멍을 때리더라도 미리 들어서 있는 게 정신적으로 안정적일 것 같아서가 그 이유였다. 다양한 모양의 차량들로 문전성시를 이루던 낮 시간대와는 달리, 꽤나 한적하면서도 어둑어둑한 모습의 공항 한켠에서 우리 가족은 간단한 인사를 서로 건넨 뒤 단발성의 이별을 맞이했다. 여행사 부스에서 확인사항을 체크하고 건네받은 자그마한 지퍼백을 손에 쥔 채로 몇 시간을 더 기다려 체크인을 끝내자마자 나는 늦은 밤 열려있던 몇 안 되는 음식점과 카페를 찾기 시작했다. 기내식이 바로 나올 텐데 굳이?라는 생각이 들 법했지만 배를 미리 불려놓고 끊김 없이 잠에 빠져있는 게 훨씬 수월하다는 걸 이전의 고통 가득한 경험들을 통해 제대로 체득해 놓은 상태였기에 나는 양손에 빈틈없이 늦은 저녁거리를 들고 게이트에서 조금 떨어진 한적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스마트폰마저도 언제 재충전을 시켜 줄 거냐며 시위를 할 정도로 이 날은 유독 길게 느껴졌다. 주변에는 조금씩 목베개와 함께 드러눕는 사람들이 속속 보이기 시작했고, 내 두 눈도 급격하게 뻑뻑해져 갔다. 아직도 탑승까지는 1시간 여 정도가 남은 시점에 나는 아까 받았던 지퍼백 속 안내문들을 꺼내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스케줄과 장소들이 매우 세세하게 적혀있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았던 것에 대한 핑계를 단순히 가득 쌓인 피로감 때문으로만 치부할 순 없었으리라. 내가 존경하는 외국 작가님이 한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방문할 장소에 대해 전혀 모르고 가는 것도 해 봐야 한다고. 그래야 본인이 온전히 가지고 있는 시각만으로 그 장소에 대한 기록을 더욱 날카롭게 남길 수 있는 것이라고. 이 참에 도전해 봐야겠다는 강렬한 의지와 왜 하필 늪에 빠져있는 이 시기에 이런 기회가 찾아왔냐는 원망이 한꺼번에 들이닥치면서 곧바로 불안 수치는 또다시 상승곡선을 그렸다. 그래도 혹시 모를 비상시에 대비해 요일 별 묵을 호텔들과 혼자서라도 가보고 싶은 장소 몇 곳들을 지도 앱 즐겨찾기에 추가하는 방법으로 급하게 불을 꺼내려 갈 때 즈음 게이트에서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곧 기내에 탑승할 예정이니 미리 줄을 서 달라는 내용이었다.
주변 정리를 하고서 간단한 세수와 양치질을 마치고 화장실을 나와 행렬 끝에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빨리 수면을 취하고 싶어 그랬던 건지는 몰라도 전보다 일사불란하게 기내로 들어서서 자리를 잡았다. 피로를 못 이기고 가라앉아버린 안쪽의 분위기와는 다르게 창문 밖으로 비치는 지상직 근로자들과 여러 모양의 불빛들은 여전히 요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대신해 줄 사람이 없어서 즐겁고 힘든 게 사진이잖아? 그러니까 그냥 늘 그래왔듯이 가서 최대한 쏟아붓고 오자. 기대는 조금 비워두고."
잠깐의 빈 시간 동안 스스로 생각을 정리하고 아래 달려있던 바퀴가 지면에서 떨어졌다는 몸의 신호를 받자마자 이어 플러그와 안대를 채운 채 꽤나 힘겹게 버티고 있었던 나의 고개도 절로 떨어져 내렸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났는지, 거리가 얼마나 남았는 지도 모른 채로 나의 몸은 '코카서스 3국'이라 불리는 물음표 가득한 곳에 점점 가까워져 가고 있었다.
예상보다 수월하게 비행을 치른 것과는 다르게 몸과 정신은 땅에 발을 다시 디디자마자 아제르바이잔이라는 나라에 본격적으로 어색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그런 나를 알아보고서 정신 차리라고 일침을 가하고 싶어 의도적으로 그랬을 리는 만무하지만, 입국심사장에서 만난 제복을 입고 있던 여성 장교의 말투와 톤은 약간은 무례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상당히 거셌다. 여태껏 겪었던 다른 나라들에서도 이 포지션에 있던 사람들의 행색은 대부분 비슷해 늘 그러려니 했지만, "이번 여행, 생각보다 더 빡세겠는걸?"이라는 말이 바로 튀어나올 정도로 그 위압감이 나에겐 조금 더 피부에 생생히 닿았다. 어쩌면 이런 장면 또한 무지에서 오는 두려움이 만들어 낸 일종의 과민반응이었다고도 볼 수 있었을 것 같다. 그래도 수하물로 부쳤던 일행들의 캐리어들이 모두 손으로 무사히 돌아왔다는 점, 그리고 출구에서부터 반겨주었던 날씨가 내가 좋아하는, 바람이 조금 강하긴 했어도 '따땃하다'라는 단어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고 있었기에 이런 것들로 가볍게 기분을 전환하고 우리를 안내해 줄 대형 버스에 올라탈 수 있었다.
수도 바쿠에 진입하면서부터 유심히 바라보았던 바깥의 풍경들에서 받은 첫인상은 크게 2가지였다. '북한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전을 했다면 이런 분위기를 띄지 않았을까?' 와, '시간이 시대에 맞게 잘 흐르는 듯하면서도 곳곳에 멈춰있는 모습들이 끼워져 있다는 것'이었다. 자신들이 산유국, 더 나아가 힘을 숨기고 있는 부국이라는 것에 대한 프라이드를 뽐내고 싶은 듯 이곳저곳 크고 웅장한 건축물들을 지어놓은 걸 볼 수 있었지만 그 모습이 전체적인 도시 경관의 측면에서는 조금 어색한 부분으로 다가왔고, 그런 요소들을 지탱하는 시민들의 표면적인 인상들은 좋은 의미로 심심하게 내 눈에 비추어졌다. 랜드마크들을 위주로 빠르게 움직이고 이후에 셰키와 고부스탄 같은 외곽 지역을 추가적으로 방문했음에도 이런 1차적인 이미지들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 가장 짙게 남아있는 것을 보면 나의 머릿속에서 막연하게 그려보았던 청사진에서 크게 벗어난, 소위 말하는 신선한 충격과 같은 모습으로 다가왔던 게 아닐까 싶다.
이 나라에서의 시간이 그리 많이 할당되어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던 탓에 이동하는 내내 조급한 마음이 함께 했다. 더불어 나에게는 최소 30분이라도 혼자서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을 시간이 간절했으므로 이번 여행도 일본에서처럼 기회가 될 때마다 조금 이른 새벽에 홀로 밖을 나섰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30여 명 정도 되는 일행들과 전체 일정에 그 어떠한 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만 행동하는 것을 제1원칙으로 정하고서. 내 기준에서 '걸어서 갔다 올만한' 거리에 위치해 있던 헤이다르 알리예브 센터를 다시 가보는 것으로 설정하고 몸을 옮기는 와중에도 뜨멈뜨멈 비추고 있던 가로등과 끊겨 있던 보도, 귀척을 느끼고 반응하던 들개 무리들을 마주할 때마다 발걸음을 돌려야 하나 라는 마음이 가득 들어찼던 그 당시의 심정을 모든 게 끝나고 난 현재에 웃으면서 말할 수 있다는 게 어찌 보면 참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이쪽으로 걸어서 가도 되는 거 맞아." 라며 깊게 잠긴 목소리로 대답해 주던 한 빌딩 경비원 아저씨를 중간에 만난 것 또한 크나큰 행운 중 하나였다. 이 지점에서 그 어떤 확신이 없었다면 아쉬움만을 안고 호텔로 돌아갔을 테니까.
이런 고비들(?)을 넘기고 도달해서 인지는 몰라도, 조지아로 이어지는 국경을 통과하기 전까지 기록했던 이틀간의 사진들 중에서 이 시간대에 찍었던 컷들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특히 해가 올라오면서부터 조금씩 건물을 비추며 계조가 극대화되었던 모습은 올해 마주했던 장면들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아름다웠다. 굳이 비유하자면 어떤 음식을 먹었을 때 형식적으로 "맛있다."라고 말하는 게 아닌, 정말 너무 좋아서 그동안 뱉었던 문장들을 뒤로하고 "진짜 오랜만에 맛있는 거 먹는다."라고 진심을 다해 표현하고 싶은, 그런 기분이었다. 이와 함께 당시를 더욱 회상하고 싶게 만들었던 또 다른 이유는 바로 그 주변에서 마주한 로컬 사람들이었다. "여기서는 'Hello'가 아니라 '살람'이라고 인사하는 거야."라는 것 외에도 친절하게 많은 것들을 알려주었던 센터 경비원, 새벽 운동을 위해 공원으로 출근한 어르신들, 일터로 향하는 와중에도 낯선 외모를 보고 "코레아노?"라고 물음을 던졌던 중년의 아저씨까지. 직접적인 교류가 없다 한들 이런 모습들을 겪고, 목도하다 보면 '이방인'이라는 직책의 무게에서 한 움큼 가벼워질 수 있고, 아주 조금이나마 이 나라에 스며들었다는 느낌마저('착각'이라고 해도 좋겠다.) 들게 해 준다. 조금 더 머물며 '불의 나라'라고 일컬어지는 이곳을 알아갔으면 좋았겠지만, 입국하면서 느꼈던 선입견 섞인 낯가림이 빨리 떨어져 나갔다는 것에 만족했다. 하지만 한편에는 긴장감을 계속 보듬고 있었다. 이후에 마주할 다른 2개의 나라들은 나를 어떻게 대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바로 맞닿아있는 경계를 넘었다고 해서 얼마나 큰 차이가 있겠나 싶었지만, 놀랍게도 두 국가 간의 분위기 전환은 예상보다 조금 더 빠르게 진행됐다. 내 멋대로 상상해 보았던 코카서스 3국에 가장 들어맞았던 그림은 바로 이곳, 조지아였다. "확실히 지대가 높은 편이구나"라는 체감과 함께 더욱 전원적이면서도 웅장하고, 고요한 색깔을 띠고 있다는 것을 첫 번째 장소였던 시그나기로 이동하면서부터 눈치챌 수 있었다. 아제르바이잔 때와는 반대로 내가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조지아 에피소드들은 수도인 트빌리시가 아닌 풍경 좋은 여러 작은 지역들에서 만들어졌는데, 물론 여행 일정이 이 부분에 있어 큰 영향을 미쳤겠지만 도심지와 자연경관 중 하나를 고르라 하면 무조건 전자를 뽑는 내 입장에서는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첫 번째 페이지에서 얻은 기분 좋은 인연의 기운을 이곳에서도 이어나갈 수 있었던 데에는 다름 아닌 현지 가이드였던 게오르기 덕분이었다고 생각한다. 검문소 출구에서 새로운 버스와 함께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덩치 큰 사내에게(아직도 그가 25살의 유부남이라는 사실이 적지 않은 쇼크로 다가온다.) 개인적인 감정은 따로 없었지만 간단한 인사치레를 하는 것이 습관처럼 몸에 배어 있던 내가 먼저 영어로 인사를 건넸던 게 시작이었다. 그 친구도 내가 그룹에서 가장 나이가 적고 항상 대열의 맨 뒤에서 움직였기 때문에 반 강제적으로 그랬던 걸 수도 있지만, 며칠을 함께하면서 문법적으로 완전하지 않은 대화를 조금 나누었던 게 힌트가 되어 나는 이곳 사람들에게도 틈틈이 다가가 말을 걸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특히나 구다우리에서 카즈베기를 거쳐, 주타로 이어졌던 일정에서 우연히 만나 기록했던 사람들의 사진들을 보며 그때의 시간을 떠올리는 것은 언제나 그 자체만으로도 큰 배움을 준다. 기회가 될 때마다 거리에서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포착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두고 나서부터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 무의식적으로 결여되어 가고 있었는데, 오랜만에 이런 직접적인 사진을 찍음으로써 반성과 함께 나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은 앞으로의 사진 생활에 있어서도 꼭 필요했던 부분이었다. 자세히 알지 못하는 그들의 문화에 대해 먼저 악수를 청하며 물음을 구하는 것이 내가 보일 수 있었던 최대한의 존중이었고, 그들을 충분히 납득시켰길 희망하며 셔터를 눌렀다. 다행히도 이런 마음이 통했는지 그들이 건네어 준 미소와 제스처들은 평화로웠던 주변 환경과 잘 어울리는 듯 보였다. 헤어지기 직전에 그들이 던졌던 "아르메니아 사람들은 우리처럼 친절하지 않다고!"와 같은 유쾌한 농담도 같이.
'좋게 말하면 다양하고, 나쁘게 말하면 특정한 주제가 없다.'로 나의 짧은 사진 역사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부분에서는 여전히 고민을 하지만 아직까지는 나를 찾는 과정이라 생각하고 마음에 드는 장면들을 최대한 많이 기록하려 노력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한 우물만 파는 사람들이 정말 존경스럽고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하지만 그런 그들과는 조금 다르게 걸어가 보려 한다. 헤매는 게 멈추고 내려놓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그리고 어디서, 언제 새로운 즐거움을 발견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
매번 낯선 여행을 준비할 때마다 한숨 섞인 목소리를 내는 게 거의 레퍼토리처럼 굳어졌지만, 또 한편으로는 나의 이런 중구난방과도 같은 성격 덕에 가벼운 슬럼프들을 빠르게 벗어날 수 있는 것 같다. 만약 내가 스트리트 포토 하나만 보고 가거나, 인물이 필수적으로 프레임 안에 들어가는 작품들만을 원했다면 이런 좋은 장면들은 내가 아닌 남들의 스마트폰과 카메라에만 담겨 있었을 것이다. 일본과 캐나다에서 기록했던 컷들보다는 상대적으로 뻣뻣한 느낌이 다소 들지만 근래에 얻기 힘들었던 심리적인 만족감을 조지아에서 가장 많이 받을 수 있었던 데에는 바로 이런 솔직함과 진중함이 피사체와 잘 연결되었기 때문 아니었을까?
"이제 조금씩 집이 그리워지기 시작했어."라는 향수 섞인 말들이 속속 귀에 들리기 시작하면서부터 멀게만 느껴졌던 이 여행도 점점 끄트머리에 다다르고 있는 듯했다. 이곳을 떠나기 전 날 저녁에 잠시 트빌리시 중심부에서 혼자 돌아다닐 여유가 생겨 커피 한 잔을 들고 정처 없이 길을 걸었다. 우리 일행들을 태우고 강가를 휘젓고 다니던 보트들은 떠들썩했고, 관광객들이 다수 섞인 거리 안 사람들은 저녁과 함께 한두 잔 걸친 와인 때문이었는지 미소 위에 취기가 진하게 그려져 있었다. 어떤 알맹이를 얻고자 한 것보다는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혹은 이 시간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특히나 이 지역은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여행지에서 마냥 흘러가는 시간이 아깝다는 마음에 그들과 섞여 30분 정도를 맴돌고 다시 모이기로 한 지점으로 돌아온 나의 뒤로 일행들 또한 곧이어 모습을 보였다. 분위기 때문에 대략적으로 예상은 했지만 호 와 불호가 철저히 갈린 채로 보트 투어에 대해 토론을 벌이는 어른들의 목소리에 그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면서 다시 버스에 올라탔다. 차량들로 빽빽이 막혀있던 광장 로터리를 빠져나와 상권들이 모여있는 곳으로부터 조금 떨어져 있던 호텔에 가까워짐과 동시에, 점점 작아져 가는 한 뭉치의 불빛들을 바라보며 나의 조지아 이야기는 막을 내렸다. 그 어떤 아쉬움이나 후회를 남기지 않은 채로.
흡사 지방의 버스터미널과 같아 보였던 두 번째 검문소를 모두 무사히 통과하고 버스는 계속해서 내달렸다. 과식으로 속이 약간 더부룩했던 게 옥에 티였지만 시작보다 여유가 생겼던 덕에 점점 바닥으로 가고 있던 체력과는 별개로 두 눈은 계속 맑음을 유지하고 있었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풀밭들과 오래된 마을들을 쫓으면서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한껏 긴장이 풀린 가이드 님의 설명이 줄줄이 들려왔지만 열렬한 학생이 아니었던 나는 그저 한 귀로 듣고 흘리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깊게 박힌 단어가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소비에트 연방'. 아르메니아라는 나라가 과거에 얼마만큼 단단한 연결관계를 맺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위에 있는 사진들 주변에서 나와 함께한 사람들이 '소비에트 벤츠' , '소비에트 드링크'와 같이 곁들임처럼 사용하는 것을 보면서 그 크기를 약간이나마 짐작해 볼 수 있었다.
수도 예레반을 포함해 이곳 생활의 템포는 상당히 느려 보였다. 그런데 그 느림이 외세에 의해 브레이크가 강제로 걸린 건지, 아니면 역사적으로 안에서부터 발생된 것인지는 어떻게 알 도리가 없었다. 순전히 내가 바라본 1차원적인 느낌일 뿐이다. '천천히'와 연관된 단어들이 곧 '불편함'과 '불행'을 동반하는 요즘의 세상이지만 이들의 삶은 그런 의미와는 거리가 먼 수준이 아닌, 아예 존재했던 적이 없었던 것처럼 보였다. 약간 굴곡진 언덕길을 터덜거리며 올라오는 차를 보면서 '우려'와 같은 감정이 먼저 들었던 나와는 다르게, 운전석에 타고 있던 어르신이 대수롭지 않은 듯 손 인사를 건넸던 일을 하나의 좋은 예시로 들어볼 수 있겠다. 이렇게 여행을 통해 또 하나를 배운다. '남의 삶을 내 것에 맞추어 생각하지 말고 최대한 있는 그대로 바라볼 것.'
경유지였던 카타르로 넘어가기까지 남아있던 마지막 이틀의 시간 동안 나는 혼자서 자유롭게 예레반 주위를 돌아다녔다. 백미 중 하나라던 아라랏 산과 가르니 신전에 닿지는 못 했지만 그렇게까지 아쉬움이 남거나 하지는 않는다. 전략적 요충지 마냥 둥그렇게 형성된 아담한 사이즈의 수도는 이전의 날들 동안 거쳤던 시골 동네들과는 아예 다른, 별개의 나라라고 느껴질 정도였다. 가보지도 않은 이스라엘이 약간 이런 분위기를 띄고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는데, 사람들의 외모와 지리적 구조 등, 상당히 유사한 부분이 많은 것처럼 보여 그랬던 걸지도. 해코지를 당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몸을 움직이는 동안 신기한 듯 동양인이었던 나를 쳐다보던 수많은 시선들과, 한번 말이라도 걸어볼까 쭈뼛쭈뼛 액션을 취하는 아이들의 모습에 애써 눈치를 못 챈 것처럼 행동했던 것도 이곳에 머물며 있었던 자그마한 해프닝들 중 하나였다.
세 국가들 중에서 가장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문물들에 인색할 줄 알았던 나의 예상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완벽하게 빗나갔다. 시내 중심부에 기다란 쇼핑거리가 놓여있었고 누구나 한번 즈음 들어보았던 브랜드들이 전부 모여있는 것에 놀란 표정을 지었던 것도 잠시, 이런 모습에 크게 관심이 없었던 나는 빠르게 지루함이라는 감정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러다가는 앉아서 멍 때리기 밖에 더하겠냐는 생각에 여기서도 관광객들의 손이 잘 닿지 않는 '찐 로컬' 장소들을 찾아보고자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마저 들이붓고 나서 몸을 일으켜 무작정 원의 중심부를 벗어났다. 재수라면 재수였던 점은 같은 경로에 제노사이드 메모리얼 콤플렉스가 있어서 겸사겸사 같이 둘러보고 올 수 있었다는 것. 관광용 대형버스들보다 승용차와 시내버스들이 많이 돌아다니고, 알파벳이 아닌 전혀 알아볼 수 없었던 글씨들로만 연결되어 있던 가게 간판들만이 보이면서부터 공기가 바뀐 것을 단번에 캐치할 수 있었다. "이 사람 왜 여기에 혼자 있지?"라는 표정으로 쳐다보던 시선의 밀도 또한 시내와는 다르게 더욱 농밀하게 느껴졌다.
딱히 눈에 들어오는 게 없던 차에 콤플렉스로 올라가는 곳 주변에 위치해 있던 축구 스타디움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어 있는 것을 보고 나 또한 걷는 방향을 약간 틀어 그들 쪽으로 향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매 주말마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벼룩시장 같은 모습이었다. 동묘시장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온갖 잡동사니들이 바닥에 깔린 채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의사소통에 대한 일말의 기대 없이 주변을 배회하고 있던 나에게 한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한 손에 타들어가는 담배를 잡고 신기한 걸 보여주겠다며 그는 자신의 자리로 안내해 온갖 소련 시절 물품들을 나에게 꺼내 소개했다. "이거 다 진품이야?"라는 말에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왔지만 그럼에도 온전히 믿지 않았던 나는(가격 또한 생각보다 높았다.) 지폐와 기념메달을 형식상 몇 번 만지작 거리고는 이따가 다시 돌아오겠다는 완곡한 거절을 그에게 전하고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이 만남은 내가 여기서 벗어나기까지 나눈 유일한 대화로 남겨졌다.
정말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비슷한가 보다. 나에게는 조금 어색한 장소와 얼굴들일뿐, 1시간 여 정도 보았던 그곳에서의 모습은 우리네의 주말 풍경과도 같았다. 약간 허기가 진 어르신들은 삼삼오오 모여 챙겨 온 과일을 나누어 드셨고, 옆에서는 조금만 더 깎아달라며 반 장난식으로 고래고래 소리를 친다. 주차장 바깥쪽에 붙어있던 잔디구장에서는 아이들이 축구 레슨을 받고 있고, 부모들은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자식들을 지켜보는 이 풍경이 너무나도 다른 듯 익숙하다. "그러면 결국 똑같이 지루했던 거 아니요?"라고 물어본다면 그에 대해 완벽하게 반박을 못하겠지만, 이번에도 나는 예전과 같은 2가지 대답만을 남길뿐이다. "해본 것과 안 해본 것은 천지차이." 그리고, "그냥 나는 이게 좋아서".
저녁 시간에 맞추어 호텔로 돌아와 간단히 샤워를 하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서 9층으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 문을 열자마자 떨어지기 시작한 황금색 태양빛이 여러 곳으로 반사되어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여행의 마지막 날에 맞이할 수 있는 최적의 분위기 임에는 틀림없었다. 테이블을 채우고 먼저 식사를 하고 있던 일행들 중에 빈자리를 찾아 함께 하면서 간단히 마지막 인사를 서로 주고받았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던 듯 많은 문장들의 시작점은 달랐지만 결론만을 빼내어 모아보면 모두 "잘 마무리해서 다행이다." , 혹은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여행이었다."와 같은 뉘앙스로 묶였다. 새로운 여행에 대한 떨림은 모두 벗겨지고 다시 포근한 집으로 돌아간다는 익숙한 기대감으로 뒤바뀌어 가고 있던 시간, 나 또한 남들의 눈에 띄지 않을 만큼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기를 반복하며 힘 잔뜩 들어가 있던 양쪽 승모근의 긴장을 조금씩 제자리로 돌려놓았고, 얼마 남지 않은 이곳에서의 순간들을 천천히 음미했다.
방으로 돌아와 널브러진 짐을 하나둘씩 챙겼다. 원래도 더러웠지만 이 짧은 텀에 산전수전 다 겪어서 더 엉망이 된 운동화는 비닐백에 가두고 대신 슬리퍼를 꺼냈다. 몇 시간 뒤에 공항으로 넘어가야 했기 때문에 잠에 들기도 애매했던 나는 문 앞에 캐리어와 백팩을 두고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여태까지 기록한 사진들을 훑어보았다. 혹여나 잘못 눌려 데이터가 날아갈까 봐 천천히 넘기며 고개를 상/하 , 좌/우로 흔들기를 반복했지만 전원을 끄고 배터리를 분리한 이후부터는 그 어떤 감정에 크게 동요되거나 하지 않았다. 그저 처음 비행기에 탔을 때 했던 다짐을 잘 이행했고, 그러면서 경험한 여러 부분들로부터 울림 있는 배움을 얻었다는 점, 그리고 나를 포함한 일행들이 문제없이 만족감 가득 싣고 한국으로 되돌아간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깔끔하게 매듭을 짓고 싶은 마음만이 옆에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 어떤 일말의 아쉬움이 하나도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럴 수가 없는 게임이다. 하지만 그런 감정에 매몰되어 시간을 허비할 여유 또한 없으니 부족하다고 생각되었던 부분들은 세세하게 노트에 적어두고 간직한다. 올해가 두어 달 정도 남았지만 내 마음은 마무리보다는 새로이 시작될 내년을 바라보고 있다. 앞으로도 기분에 따라 느끼는 시간의 속도감은 매번 달라지겠지만 짧은 듯 길었던 이 여정 속에서 순간에 대처하는 유연함과 마음을 다루는 법을 경험했으니 전보다는 조금 덜 흔들리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져본다. 새로운 장소를 맞이할 때마다 내가 뱉어내었던 말처럼.
"오,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데?"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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