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인간은 성인이 되어서도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해줄 수 있는 무언가를 원한다. 어린아이에겐 엄마, 성인이 되어선 배우자나 자식에게 그 마음이 옮겨질 수 있다. 심리학에선 한 인간이 성인이 되어 온전하게 자립하기 위해선 성장과정 중 부모와의 애착형성이 중요하다고 말하는데 특히 엄마와의 교류가 큰 역할을 한다.
요즘 생후 22개월이 돼가는 나의 쌍둥이는 한글을 못하는 성난 사자와 같다. 1분 1초 원하는 게 바뀌는데 말로 표현이 안돼 하루종이 괴성을 지르고 뒤집어진다. 박우진 작가의 '딸은 엄마의 감정을 먹고 자란다' 란 책에서 '기다려준다는 것은 아이의 감정을 보호해주는 것'이라 말했다. 심금을 울리던 글귀라 크게 써서 냉장고 문에 붙여놨는데 마음가짐과 행동은 참 다르다.
통제되지 않는 두 명의 몸부림을 받아줄 때 내 안의 두 자아가 충돌한다.
가슴에서 올라오는 분노와 머리에서 누르는 이성적 통제.
'아 진짜 언제까지 이럴 거야. 확 혼내버린다?!'
vs
'크느라 고생이구나. 조금만 더 기다리자.'
어떻게 해 줄까? 원하는 게 뭘까? 엄마가 다 도와줄게.
여러 번 말하다 안되면 난 점점 말수가 줄고 눈빛이 차가워진다. 통제되지 않는 아이를 바닥에 눕히고 자리를 피한다. 아이는 자신의 화를 엄마가 받아주지 않았다며 더 크게 운다. 계속 받아주면 버릇된다는 핑계로 아이를 잠시나마 외면던 중 아이가 나의 죄책감을 건드린다. 눈으로 내 표정을 살피더니 스스로 울음을 그치고 나에게 와서 꼭 안긴다. 마치 울어서 미안하다는 듯, 앞으로 안 그럴 테니 떨어지지 말라는 듯.
약하디 약한 존재에게 내가 무슨 짓을 했는가 싶어
아이를 껴안고 다짐한다.
'엄마가 미안해. 더 무조건적인 엄마가 될게.'
폭풍 같은 하루를 보내고 나니 내 엄마가 생각났다. 나를 키우며 얼마나 참고 수용하고 사랑해줬을까 싶어 고맙다 말하고 싶어 전화했다.그리고 난 잠시 후 엄마에게이유 없이 짜증을 낸다.
'아 몰라 엄마 때문에 짜증 나! 연락하지 마!'
나이 40이 넘은 성인이 되어서도 잘못된 방식으로 무조건적인 수용을 바라고 있었다. 수용해주지 않으면 질타하고 상처 주고 원망했다. 나이 70이 되어가는 엄마에게 나를 무조건 알아달라고 떼를 부리고 있었다. 이건 엄마로서의 역할일까? 아님 그 이상의 의무일까?
생각해보면 사실 둘 다 아닐지 모른다. 성인이 되어서도 내 마음 안에 존재하는 어린아이의 욕구일 뿐이다. 힘들고 지칠 때 언제든 마음 편히 기대어 울 수 있는 전봇대 같은 존재를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봇대가 그 자리에 없다고 해서 전봇대를 탓할 순 없다. 그게 전봇대의 존재 이유는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