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강의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
이 책을 쓴 한 강(韓江)은 1994년 서울신문에 '붉은 닻'으로 등단 해 이후 꾸준한 작품 활동을 해 온 소설가다. 원래 이 작가의 다른 책을 빌리려고 했으나, 대출 중인 관계로 이 책을 빌려왔다. (이 책을 빌려오길 잘했다.) 특히 그의 작품이 최근 해외에서 호평을 받으며 주목받고 있다. 미국에는 팬 클럽도 생겼다고 한다. 이렇게 최근 그의 작품이 해외에서 인기를 끌면서, 한국 문학의 세계 진출 가능성에 대한 희망이 고조되고 있다.
책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 - 그해, 내게 머문 순간들의 크로키 (도서출판 열림원, 2003)는 작가가 미국 아이오와 대학의 국제 창작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써 내려간 산문집이다. 그 프로그램이나 미국 여행에 대한 내용이 아니라, 그가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들에 대해, 작가 자신에 대해, 혹은 함께한 이야기에 감상이 차분히 더해져 있는 이 책을 나는 금방 읽어버렸다. 책의 분량이 적기도 했고, 상당히 재미있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읽는 것은 항상 즐겁지 않은가? (게다가 이 이야기가 ‘소설가’라는 사람이 쓴 것이라면! 그들은 거리에서 스쳐간 사람으로도 기막힌 소설 한편을 써 내려갈 수 있다. 하물며 ‘작가들’에 둘러싸여 있다니.) 이 책을 만나는 것은 그가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 자체의 감동과 재미를 느낄 뿐 아니라, 이 이야기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을 음미하고, 그리고 나 자신과 삶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유럽으로 교환학생을 갔던 경험이 떠올라 추억에 잠기기도 했다. 세계 곳곳에서 온 비슷한(나의 경우 또래들) 사람들이 한데 모여, 공동생활을 해 나가는 경험은 그 자체가 상당히 특별한 추억이 된다. 그전까진 이 지구상에서 서로 존재하는지 조차 모르다가, 어느 새 친구가 되고, 일상을 공유하고, 헤어질 때가 되면 아쉬움에 펑펑 눈물을 흘리게 된다. 서로 다른 곳에 ‘삶’이 있기에, ‘언제 어디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이별은 더 애틋하다.
프로그램이 끝나갈 무렵 작가들은 서로 정이 들어 있었고, 그곳의 삶을 좋아하고 있었다. 이제 그곳에서 세계 곳곳으로 흩어지고 나면 다시 만나게 될 기약이란 거의 없었다. 다시 그들을 모두 만나려면 1년쯤 잡고 세계 여행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무모하게, 서로서로에게 정을 주었고 그 때문에 기쁨과 슬픔을 느꼈다. (151p)
공간과 일과를 공유하다 보면 짧은 시간이라도 깊게 정이든다. 너무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에는 오히려 슬픔이 찾아오기도 한다. 이 순간이 사라져 간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때의 나는 그 순간이 흘러가는 것을 아쉬워하곤 했다.
나는 그곳을 떠나던 날 아침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날의 공기는 유독 낯설었다. 전날 친구들과 마지막 밤을 새웠는데, 새벽 5시쯤 골목의 후미진 가게에서 먹은 피자가 그렇게 맛있었다. 아침이 되고 나보다 이른 기차의 친구를 배웅하면서 이별이 실감 났다. 특별히 친했던 친구들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우린 “우리는 다시 만날 거니까”라며 웃었다. 캐리어를 끌고 나와 뒤돌아 본 기숙사의 모습을 보고, 사진을 찍었다. 그 순간을 오래 간직하고 싶었다. 사진에 지금의 마음을 담기길 바라면서.
그 방을 떠나면서 나는 언젠가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다. 돌아와서 저 풍경을 꼭 한 번만 더 보고 싶다고. 동시에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이렇게 마지막인 것이 좋다고도 생각했다. (86p)
긴 시간의 비행 후 인천 공항에 도착했을 때의 느낌도 기억이 난다. 익숙한 글자, 익숙한 말, 익숙한 공기. 내가 살아온 나의 땅. 그리고 나를 기다리던 엄마의 얼굴.
비행기가 활주로를 미끄러져 가는 동안 내 마음의 ‘안테나’가 떨며 나에게 말해주었다. 나의 생애가 시작되었던 곳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이제부터는 내가 지구 반대편에서 겪었던 모든 일들이 꿈이 되고, 꿈처럼 여겨졌던 모든 일들이 다시 현실이 된다는 것을 – 그 안에서 살아가야 할 일이 남아 있다는 것을. 기쁨보다 벅찬 결연함 때문에 내 입술은 굳게 다물어져 있었다. (146p)
쓰다 보니 일종의 ‘추억 되새기기’가 되었다. 그것이 이 책이 가진 힘이 아닐까. 조용한 기차 안에서, 혹은 늦은 오후 소파에서 커피 한 잔 마시며 읽으면 좋을 법한 책이다. 모두 각자의 아름다운 '어떤 경험'을 떠올리면서. 그곳에서 만난 아름다운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그 순간들을 생각하며 돌아갈 수 없음에 슬퍼할 필요는 없다. 그때가 아름다웠던 건 '그때' '그 사람들'과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매일 매일은 이렇게 수 많은 우연이 모여 소설의 새로운 한 페이지를 만들어간다. 덴마크는 'Hygge'(휘게)의 나라로 불린다. 편안함, 따뜻함, 친절함, 배려심, 신뢰감 등을 포함 철학적이고 민속적이며 종교적인 의미를 아우르는 이 덴마크어는 우리의 '한'恨이나 '정'情처럼 그들의 정서와 문화를 대변한다.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식사를 하고 대화를 나누며 보내는 안락하고 아늑한 모든 상태'와 같은 덴마크 특유의 휴식문화를 일컫기도 한다. 휘거의 정서에 따라 서로를 존중하고 인정하면서, 작은 것에 만족하며 감사하는 삶을 사는 것이 덴마크가 항상 '세계 행복지수' 상위권에 머무는 비결인지도 모르겠다.
그런가 보았다. 우리는 좀 더 쾌적한 집과 좀 더 많은 수입, 좀 더 나은 생활을 동경하며 살아가지만,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곳에 있는가 보았다. 정말 귀중한 것은 값 나가고 어려운 것들이 아니라, 숨 쉬는 공기와도 같았던 것들, 가장 단순하고 값 나가지 않는 것들, 평화, 우정, 따뜻함 같은 것들이었나 보았다. 어린 시절부터 귓바퀴에 못이 박히게 들어왔던 이 진부하기 짝이 없는 진리가 어느 날 가장 생생하고 낯선 메시지가 되어 가슴에 꽂힐 때, 그때 우리는 나이를 먹어가는 것인지. (139p)
독일의 시인 칼 부세(Karl Busse, 1872-1918)는 다음의 <저 산 너머>라는 유명한 시를 남겼다.
산 너머, 고개 너머
먼 하늘에 행복은 있다고
사람들은 말하네.
아, 나는 남 따라
찾아갔다가
눈물만 머금고 돌아왔다네.
산 너머, 고개 너머
더욱더 멀리
행복은 있다고
사람들은 말하네.
나도 누군가 에겐 ‘어디서’ 만난 ‘누군가’이다. 나는 그들에게 어떤 사람이었을까? 어떻게 기억되고 있을까?
나는 아직 기억하고 있다.
그해, 내가 어디에 있었는지.
나에게 무슨 일들이
일어났었는지.
어떤 사람들을 만났었는지.
나의 마음은 어디를 서성거리고
때로 헤매었는지. (148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