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의 열차티켓

영화 <리스본의 야간열차> 를 보고...(스포 많음)

by 서리다

그레고리우스(제레미 아이언스)는 우연히 갖게 된 오래된 책 <언어의 연금술사>와 책 속에 끼어 있던 출발 시간 15분 남은 열차 티켓을 들고 역으로 달려간다. 고전문헌학을 전공하는 교사로서 탐구심이 발현되었겠지만, 단조로운 일상에서의 탈출을 무의식 안에서 바란 게 아닌가 싶다. (나라도 손에 쥔 열차 티켓, 막 출발하기 시작한 열차, 무조건 올라탔을 것 같다.) 기차에 오른 순간 기차의 종착역인 리스본은 그의 목적지가 되었고, 가는 동안 읽은 책 속의 인물들을 만나기 시작한다. 타성에 젖어 무료했던 주인공은 어느새 경쾌한 발걸음과 함께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책 한 권 달랑 들고 찾아온 불청객을 맞이한 책 속 인물들은 각자의 잊지 못한 기억, 잊을 수 없는 기억, 사실은 잊고 싶지 않았던 기억을 이야기한다. 우연히 만나게 되는 그들은 과거 암울한 역사 속에서 목숨을 걸며 투쟁하고 동시에 열렬한 사랑을 하던 청년들이었다. 책 속의 주인공이자 작가인 아마데우 프라두(잭 휴스턴)는 귀족 집안의 의사로 부족한 것이 없었으나 혁명에 가담하고 친구 조지와 주앙 그리고 모든 것을 기억하는 여자 스테파니아와 함께 파시스트적 독재정권에 대항하는 레지스탕스 활동을 한다. 혁명 가운데 불타는 사랑과 질투, 애증과 같은 감정의 소용돌이도 함께한다. 아마데우의 동생 아드리아나가 오빠의 노트로 책을 낸 것이 우연히 그레고리우스에게 닿았고, 그들과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전하며 과거를 현재로 소환해 스스로 또는 서로의 오해를 풀고 화해를 할 수 있게 된다. 리스본으로 향하게 했던 책의 주인인 여자는 독재정권의 악마 멘데즈의 손녀였다. 책에서 할아버지의 만행을 알고 자살을 하려다 우연히 지나가던 그레고리우스를 만나 죽음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우연히 만난 여자, 책, 열차 티켓으로 그레고리우스의 인생은 달라진다. 우연을 새로운 운명으로 만들었다. 여정 중 만난 마리아나(마르티나 게덱)와의 마지막 장면 역시 5분 후 출발하는 열차 앞이다. 또 한 번의 운명을 선택하는 순간이다.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쳤다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테고 여전히 지루한 교사 생활을 유지했을 거다. 나는 그레고리우스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려는 기차를 절대 타지 않았을 거라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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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요란한 사건만이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결정적 순간이 되는 건 아니다. 실제로 운명이 결정되는 드라마틱한 순간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사소할 수 있다.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고 삶에 완전히 새로운 빛을 부여하는 경험은 소리 없이 일어난다. 그 놀라운 고요함 속에는 고결함이 있다.”(<언어의 연금술사> 중에서)




나는 어떤 선택의 순간에 생각을 깊이 하는 편은 아니다. 이성보다는 감성에 2% 더 기울어진 듯하다. 가슴이 요동치는 쪽으로 향한다. 흥분의 기운이 식으면 또 다른 설렘을 찾아 얼마든지 열차를 갈아타기도 한다. (자주 갈아타는 게 문제이긴 하다.)

이제 먼 이야기 같지만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IMF로 인한 무너진 집안의 경제상황을 감당해야 했다.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한 나는 학원강사의 길로 어렵지 않게 들어섰다. 처음엔 이왕 시작한 강사생활 신나게 하자 하고 스타강사를 꿈꾸며 많은 시간을 투자하며 열심히 일했다. 1년, 2년, 10년, 그리고 2년을 더 하고 이직을 했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의욕은 사라지고 점점 감당하기 어려워지는 아이들의 성향이 힘들게만 느껴졌다. 그런 가운데 뭐 재미난 거 없나 하고 하이에나처럼 여기저기 기웃거렸고(여기서부터 그레고리우스와 큰 차이점이겠다.) 우연히 목공방에 방문하게 되었다. 바로 이거다! 아이들과 씨름하는 것보다 나무를 다루는 것이 내 정신 건강에도 좋을 것 같았다. 학원을 그만두고 무보수로 9개월간 목공방에 출퇴근했다. 청소하고 어깨너머로 공방장님의 작업을 보고 조금씩 흉내 내며 일손을 돕는 식으로 배웠다.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 벙커침대를 제작하고 설치하는데 내 역할은 미비했어도 몸살이 나서 병원에 입원한 적도 있다. 그래도 언젠가 내 공방을 차려야지 하는 꿈을 안고 나무향에 취해 살았다. (지금은 다시 학원강사로 돌아왔다. 인생은 한 치 앞을 모르는 거다.)


옆지기가 직장을 옮기고 아이가 크면서 아빠와 함께하는 시기를 놓치면 안 되겠다 싶어 이사를 하게 되었다. 낯선 지역이라 집에서 무료하게 있다가 마을 작은도서관에서 열무 김치를 담근다기에 한쪽 얻어볼 마음에 들렀다. 새로운 곳에서 또 다른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후로 도서관장으로 3년을 지내게 되었다. 새로운 관장을 물색하던 중에 할 일 없던 내가 관장직을 호기롭게 덥석 물었던 거다. 지금 생각해보면 책 한 권 안 읽던 내가 무슨 배짱으로 수락을 했는지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때 잡은 나의 운명은 내가 책과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었고 책 한 권 없던 우리 집엔 책이 방 하나 가득하고도 거실까지 점령되고 있다. 지금은 이렇게 읽는 삶에 쓰는 삶도 한 스푼 얹으려 하고 있다.




“우린 우리 일부를 남기고 떠난다. 그저 공간을 떠날 뿐. 떠나더라도 우린 그곳에 남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돌아가야만 찾을 수 있는 것들이 우리 안에 남는다. 우리가 지나온 생의 특정한 장소로 갈 때 우리 자신을 향한 여행도 시작된다. 그 여정의 길이는 중요하지 않다.”(<언어의 연금술사> 중에서)



어쩌면 인생에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언제나 출발 대기 중인지 모른다. 타성적 삶에 압도되었다고 여겨지면 언제든 용기를 내어 올라타도 좋을 거다. 우연의 티켓을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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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정보


타이틀 = 리스본행 야간열차 (Night Train to Lisbon) 2013

감독 = 빌 어거스트

출연 = 제레미 아이언스, 멜라니 로랑, 잭 휴스턴, 마르티나 게덱

제작국가 = 독일, 스위스, 포르투갈

원작 = 파스칼 메르시어가 쓴 동명 소설

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