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단을 끊어내는 판단
안 그래도 감기로 고생 중인 하늘이가 바지를 벗고 기어 다닌다. 9개월짜리 아이가 혼자 벗었을 리는 없고. 안 봤지만 뻔하다. 감기 걸린 하늘이보다 내가 더 열이 오르는 것 같다.
“빛이야. 너 하늘이 바지 벗겨놨어?!”
“아니. 하늘이 바지가 이렇게 쪼끔 옆으로 돼 있어서 잘해줄라 한 거야.”
이미 질문의 강도를 느꼈는지 빛이도 억울한 듯 발끈한다. 방귀 뀐 놈이 성내는 것 같으면서도 세상 억울해하는 빛이의 표정을 보니, 순간 나도 정신이 번쩍 든다. 마음을 가다듬고, 소리를 낮추고, 모른 척 다시 예쁘게 톤을 바꿔 묻는다.
“아, 빛이가 하늘이 바지 잘 벗을 수 있게 도와준 거구나?”
역시 물어보기 나름이다. 새롭게 태어난 따뜻한 질문에 해맑은 진실을 듣는다.
“응, 맞아! 내가 잘 벗겨줬어.”
바닥에 쏟아진 우유, 벽에 칠한 낙서, 식탁에 찍힌 자국, 아이가 입은 옷에 묻은 음식물, 손잡이가 깨진 컵...
무슨 생각이 드는가.
이러한 모습은 아이를 키우다 보면 흔히 마주하는 장면임에도 볼 때마다 늘 감정부터 올라온다. 그 상황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노라면, 평소 내 말을 귀담아듣지 않은 결과 및 아이의 부주의함이란 결론에 이른다.
우린 결과만 보고 과정까지 추측해서 판단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추측의 과정이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은 배제되고, 깊어진 추측은 확신이 된다. 잘못된 추측에 더해진 확신은 '화'로 이어지고, 결국 상대에게 상처를 남긴다.
진실을 듣고 싶으면 내 마음을 먼저 가다듬어야 한다. 진실한 대화를 나누고 싶으면 소리를 낮추고 톤을 바꿔야 한다. 내가 먼저 진실하게 다가가야 상대의 진실도 드러난다.
'너도 다 나름의 이유와 의도가 있었겠지. 아빠도 잘해보려 하는데 마음대로 잘 안 될 때가 있거든.'
판단을 끊어내는 판단으로 다행히 화를 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