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층집 정원일기 13
신생아도 아닌데 밤낮이 바뀌었다. 밤새 원고를 보고 새벽에 잠이 들어 낮에 일어난다.
지난주 원고를 출력하러 6~7km 시내로 나갔다. A4 80장에 4,000원. 계산하며 근처 맛있는 빵집을 물어보았다. 소개받은 두 군데 중 두 번째가 유기농 빵집이었다. 호밀식빵과 카레 고로케(크로켓)와 밤과자를 샀다. 얼마 만에 먹어보는 빵인지… 집에 오자마다 고로케를 먹고 밤과자는 다음 날 주인집에 드렸다.
그날부터 내 주식은 식빵이다. 하루 한 쪽을 먹으면 든든하다. 감자를 삶아 매쉬드 포테이토를 만들거나 달걀 프라이를 해서 얹어 먹는다. 원두가 다 떨어져 믹스커피를 마신다. 우유도 떨어졌다. 과일 떨어진 지도 오래였는데 중복 때 생긴 수박이 있다. 최근 수박을 먹으면 목구멍이 부었던 적이 있다. 드물게 수박 알레르기가 있는데, 무시하고 계속 먹었더니 괜찮아졌다.
예전에 함께 교회 다니던 이가 그랬다. 여름에 수박과 겨울에 귤을 맘껏 사 먹는 게 잘 사는 기준이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말로 들으니 그때부터 정말 그렇게 인식되었다. 여름 수박과 겨울 귤은 풍요로움의 상징이라고. 그래서인지 목구멍이 잠시 부어도 여름철 수박은 포기할 수 없는 품목이 되었다.
오래전 교회 친구도 그랬었다. 식구들 먹고 싶은 걸 마음껏 사 먹일 수 있는 게 잘 사는 거라고. 그 친구는 돈도 아주 많이 벌고 외식도 즐겨 하지만 비싼 음식을 즐겨 먹지는 않는다.
21세기인데도 먹는 게 부의 척도가 되기도 한다니 참 소박한 친구들이다.
풍족하게 먹어본 기억도 없지만 배고픈 적도 없었다. 맛있는 음식을 골고루 많이 먹어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먹는 데 도통 관심이 없는 내가 따지는 건 절기다. 설에는 떡국을, 대보름엔 부럼과 오곡밥과 구나물(9가지는 다 못 챙겨도)을, 삼복에는 닭을, 추석에는 엄마 계실 땐 토란국을 먹었지만 지금은 송편이라도, 동지에는 팥죽을 먹어야 하는… 뭐 그런. 식탐 없는 내가 먹고 싶은 건 꼭 먹어줘야 한다. 못 먹었을 때 빈곤감이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년 동지 때는 성적 처리하면서 본죽에서 나온 팥죽을 먹기도 했다. 초복 때는 삼계탕을, 중복 때는 치킨을 먹었으니 말복 때는 무슨 닭을 먹을까? 즐거운 고민을 한다.
감기에 걸려도 닭 세 마리 먹으면 낫는다는 속설이 있다. 못 먹던 시절, 소나 돼지는 흔치 않았기에 닭백숙은 단백질다운 단백질을 섭취할 수 있는 유일한 음식이었다. 지금 나는 닭 껍질을 싹 벗겨 버리지만, 옛날에는 노랗게 둥둥 뜨는 닭기름도 귀했었다. 양계장이 얼마나 대형축산으로 변했는지, 지금은 치킨과 맥주의 조합인 치맥이 한류 상징 음식이 될 만큼 닭고기가 흔해졌다. 하지만 닭 대신 달걀이라도 마음껏 먹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중복이라고 콩국수를 사준 친구가 준 머윗대를 푹 삶았다. 찬물에 헹궈 껍질을 깠다. 작년 담양 글을낳는집에서 배운 덕분이다. 껍질 깐 머윗대를 적당히 잘랐다. 기름에 볶다 들깨가루를 넣어야 되는데 들깨가루가 없다. 냄비에 머윗대를 넣고 물을 자작자작하게 붓고 냉동새우와 국물멸치와 마늘가루와 대파 조금을 넣고 끓였다. 그런데 물이 줄지 않는다. 머윗대와 냉동새우를 건져 다시 찬물에 헹궜다. 그리곤 고추장, 매실청, 올리고당, 감식초, 참깨를 넣고 무쳤다. 그런데 꼭 짜지 않아서 그런지 물이 많이 생겼다. 남겨둔 육수에 통밀국수를 조금 삶았다. 국수를 찬물에 헹궈 머윗대 무침에 넣고 비볐다. 머윗대 비빔국수, 새콤달콤하니 그런대로 맛이 있다. 삶은 달걀도 반으로 잘라 얹으니 텁텁하니 매운맛을 상쇄해 준다. 남은 머윗대는 유리용기에 담아두었다.
홍천에서 온 찰옥수수도 껍질을 까 삶아서 냉동실에 두었다.
면 행정복지센터에서 우편물이 왔다. 일회용 마스크 KF 94 두 장과 재사용 종량제봉투(크기상 5리터인데 10리터로 표시)와 종이. 그 종이 앞면에는‘도움이 필요한 복지 위기가구에게 희망을’이라고 있고 뒷면에는 ‘복지 위기가구 체크리스트’가 있다.
1. 문제가 생겼을 때 폭력(주먹질, 심한 욕설, 물건 파손 등)을 쓰는 가족이 있다.
2. 위급상황이 발생했을 때 도움을 받을 가족이나 지인이 없다.
3. 보호가 필요한 가족(영유아, 아동, 노인, 장애인)을 돌보기에 어려움이 있다.
4. 신체적으로 심한 질병을 앓고 있는 가족이 있다.
5. 우울증, 정신분열, 알코올중독 등 정신적인 질병을 앓고 있는 가족이 있다.
6. 가족의 실직(폐업)으로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다.
7. 구직활동을 하고 있으나 취업이 안 되는 가족이 있다.
8. 주거환경이 열악하지만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9. 건강이 걱정되지만 치료비가 많이 들 것 같아서 병원을 가지 못하고 있다.
10. 3개월 이상 관리비, 월세, 전기요금, 수도요금, 건강보험료 등이 체납되어 있다.
11. 가족의 죽음, 사고, 질병, 실직, 불화 때문에 우울하다.
12. 우리동네에 가족이 전혀 찾아오지 않는 혼자 사는 어르신이 있다.
13. 우리동네에 돌봄을 받지 못하고 방치되거나 학대를 당하는 아동이 있다.
14. 우리동네에 집밖에 나오려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위 항목 중 1개라도 ‘그렇다’가 있다면 아래로 꼭 연락주세요!!
아래에는 네 군데 복지팀과 민원팀 연락처가 있었다.
14가지 중 나는 무엇에 해당할까? 왜 내게 이런 우편물을 자꾸 보내는 것일까? 내 수입이 면사무소에 보고되는 건 아닐 텐데 단지 1인 가구라서? 면사무소의 관심이 고맙긴 하지만 복지 제도가 궁금하지 않은 건 아직 혼자 힘으로 살만하다는 것이겠지.
하루 두 끼, 식빵과 삶은 감자와 삶은 옥수수와 수박으로 끼니를 때운다. 먹는 즐거움이 원래도 없었지만, 이제는 버터나 기름 맛도 부담스럽고 자연 그대로의 맛이 좋다. 사람도 점점 순해졌으면 좋겠다. 호우 피해에 이어 슬프고 참담한 사고가 잇따른다. 아무리 TV를 보지 않아도 휴대폰을 열기만 하면 인터넷으로 뜨는 헤드라인을 지나치진 못한다. 슬픔도 분노도 경악도 그 어떤 자극도 힘들다.
온종일 집 안에만 있다가 초저녁이 되어 산책을 하러 나갔다. 콩이는 날 보더니 앞 다리를 쭉 뻗어 기지개를 켜고 내가 가까이 가니 펄쩍펄쩍 뛰었다. 줄을 쇠막대기에서 빼려고 몸을 수그렸는데 펄쩍 뛴 콩이의 머리가 턱을 들이받았다. 너무 아프면 비명도 나오지 않는다. 아랫입술에 윗니가 찍혀 순식간에 부어오르고 피맛이 나며 정말 아팠다. 하지만 난 소리 지르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콩이는 그저 좋은 걸 주체하지 못했을 뿐이지 날 다치게 하려던 게 아니다. 턱과 입을 쥐고 가만히 서 있으니까 콩이가 눈치를 본다. 한참을 서 있다가 다시 줄을 꺼내 콩이와 산책을 했다. 입술에 상처가 났지만 녀석을 원망하는 마음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
사랑이 있다면 세상은 평화로워질 것이다.
차가운 수박을 입술에 댄다. 상처는 곧 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