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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

이층집 정원일기 14

by 일곱째별


8월이다. 8월은 영어로 August(어거스트).

한국에 ‘삼월이’, ‘사월이’가 있듯이 미국에도 ‘팔월이’가 있다. 즉 ‘어거스트’가 이름이다. <어거스트 러쉬>란 영화도 있지 않은가. 내게 잊을 수 없는 팔월이는 1886년 5월 4일 헤이마켓 사건으로 교수형을 당하게 된 아나키스트인 어거스트(혹은 아우구스트) 스피스(August Spies)다.


1889년 8월 15일에 미국 뉴욕에 도착한 스무 살의 엠마 골드만으로 시작하는 <Living My Life>. 나는 영어로 된 그 책을 매주 금요일마다 3년 동안 읽었다. 혼자였다면 불가능했을 터였지만 함께 읽은 이들이 있었다. 10년 정도는 거뜬히 지낼 줄 알았지만, 텍스트가 바뀌며 5년여를 함께 하고 흩어진, 지금 떠올려 봐도 흐뭇한 미소가 지어지는 강인하고 아름다운 여성들이었다.


우리는 556쪽의 그 두꺼운 원서를 한 문단씩 돌아가며 직독직해했었다. 그중 내 차례였던 8쪽에 5월 4일 헤이마켓 사건이 나왔고, 거기 연사들로 Albert Parsons, August Spies, Adolf Fischer와 다른 이들이 등장했다. 앨버트 파슨스, 어거스트 스피스, 아돌프 피셔로 읽으면 됐을 걸 나는 ‘어거스트 스피스’를 ‘팔월의 스파이들’로 읽어버렸다. 맥락을 파악하지 않고 문자 그대로 읽었던 것이다. 누군가 조심스럽게 사람 이름이라고 지적해 주었다. 그 순간의 화끈거림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이후 8월만 되면 오늘날 노동절의 기원이 된 헤이마켓 사건과 폭발로 인한 사상에 대한 즉결심판으로 무죄였으나 억울하게 교수형 당한 어거스트 스피스가 떠오른다.

그는 “오늘 당신이 목 졸라 죽이는 목소리보다 우리의 침묵이 더 강력해지는 날이 올 것”이라고 했다. 당시 노동자들이 요구한 것은 하루 8시간 노동이었다.


8월 첫 주는 28년 지기 친구의 교실 흡음재 공사를 위해 제시한 날짜였다.

서울에 올라간 김에 미용실에 들렀다. 미용실 주인은 내가 미용실이라고 하면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이다. 그곳의 이름은 ‘00000 헤어앤라이프’이기 때문이다. 그와의 인연은 2017년부터일 것이다. 이번에 공사를 도와주려던 친구의 주선으로 어느 사진전에서 갤러리 관장과 사진작가와 함께 그를 만났을 때 내가 카메라를 가지고 있던 기억이 나기 때문이다. 그다음 해인 2018년에 문학상을 탈 때 그에게 프로필 사진을 부탁했다. 당시 나는 질풍노도의 시기였는데 그가 찍어준 내 사진들 중 행복해 보이는 사진이 한 장 있었다. 그 사진을 수상작품집에 실었다. 그는 무료로, 게다가 사진 아래 저작권도 표시하지 않은 채 사진을 허락해 주었다. 나중에 알았는데 그에게 프로필 사진을 찍으려면 엄청난 금액을 지불해야 했다. 나는 사진값을 차곡차곡 갚는 심정으로 그에게 머리 스타일을 맡겼다.


내 기준에 미용을 잘하는 건 커트 기술이다. 그의 가위는 실수한 적이 없다. 그리고 시간이 오래 지나도 머리가 그다지 지저분하지 않게 자란다. 나는 라이프에 변화가 있을 때마다 헤어를 바꾸러 그곳에 갔다. 물론 가격이 너무 비싸 일 년에 한두 번밖에 가지 못한다.

6년여 동안 그의 헤어숍에 갈 때마다 특별한 날에 맞춰 갈 때가 많았다. 그는 과묵한 편이어서 우리는 많은 대화를 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는 내 인생에 어떤 우여곡절이 있는지 잘 안다. 나는 그에게 꼭 집어 비밀을 지켜달라고 당부하지 않고도 내 이야기를 한다. 헤어스타일을 정하는 데 그 사람의 라이프스토리가 필요하기도 하지만, 그가 내게 다른 사람 이야기를 전하지 않듯 내 이야기도 누군가에게 전하지 않을 거란 막연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의 과묵함은 우리나라 최고 헤어디자이너가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나는 그 사실을 5년 후에야 알았다. 내 머리에 닿은 그의 손이 다른 누군가의 머리에도 닿았다니, 그의 능력이 인정받았음은 기쁜 일이다.


그가 샴푸를 해주면서 물었다.

“머리를 어떻게 하고 싶으세요.”

나는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

“세련돼 보였으면 좋겠어요.”

개강 준비를 해야 하니까.


그가 6개월 반 동안 자란 머리카락을 과감하게 잘랐다. 내가 원하는 길이보다 짧았지만, 목선이 많이 드러나야 세련돼 보인다는 그의 판단에 맡겼다.

나는 머리가 싹둑싹둑 잘려나가는 걸 보면서 쑥스러운 듯 말했다.

“귀엽게 보이고도 싶은데 세련된 거란 귀여운 건 같이 어울리기 어렵죠?”

“앞머리를 자르면 되죠.”

그가 자신 있게 말했다.


스타일이 만들어진 머리는 지난 1월, 내 인생에 매우 중요한 날과 비슷했다. 그날 난 머리도 자르고 그가 유학하고 온 영국에서 만든 브러시도 샀다. 그가 머리 손질하는 방법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드라이를 하면서 뒤에서부터 빗어넘기라고. 그는 머리 손질 못 하는 내게 최소한의 방법을 알려주었다. 자신이 잘 자른 머리를 유지할 의무가 손님에게 있으니까. 하지만 그는 내게 헤어 드라이기가 없는 걸 모른다. 그가 세련의 극치로 잘 잘라준 머리카락을 볼품없이 하고 다녔다. 머리를 감고 타월 드라이를 하고 툭툭 터는 게 전부였으니까. 그래도 고급 브러시를 산 덕분에 가끔 빗질도 했다. 그렇게 6개월 반 만에 더부룩한 머리를 하고 그에게 갔다.



내 인생 최초 미용사는 스물대여섯 살 때 명동 마샬에서 일하던 남자 미용사였다. 그가 홍대 앞에 개업하자 나는 그곳으로 가 머리를 했다. 항상 긴 머리였던 내 머리를 그는 확 자르고 노랗게 염색해 주었다. 고리타분하던 분위기가 도발적으로 바뀐 덕분인지, 나는 지상파 방송사에서 일하게 되었다. 사람에게 헤어 스타일은 인생을 바꿀 수도 있게 해 준다. 당시 나를 본 사람들은 내 외모만 보고 좀 놀 줄 아는 애인 줄 알았다. 나도 그에 부응하도록 열심히 놀아봤지만, 기질은 쉽게 바뀌지 않아서 한두 번 만에도 내가 얼마나 보수적인지는 쉽게 드러났다. 여하튼 난 인생을 바꿔 준 그 미용사가 고마워서 프리랜서 기자로 일류 잡지에 그의 인터뷰 기사를 실어주었다. 그러나 그는 얼마 있다가 결혼하고 미국으로 가버렸다. 내 이십 대는 그렇게 끝난다.


한동안 믿고 갈만한 미용실이 없었다. 십 년 후 청파동 유명 체인 미용실에 갔다가 마음에 드는 남자 미용사를 만났지만 다시 갔을 때 그는 다른 곳으로 옮겼고, 그 대신 만난 여자 미용사가 있었다. 얼마 후 그 여자 미용사가 마포에 개업을 하자 그리로 쭉 다녔다. 2017년 시상식 머리도 그이에게 했었다. 그런데 그이는 휴업을 하고 시골로 내려갔다. 꽤 오래.



그 후 만난 사람이 청담동의 이 사람이다. 이 사람은 헤어디자이너뿐만 아니라 사진작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그의 숍 입구에는 얼마 전 작고하신 김중만 사진작가의 빨간 꽃 사진이 전면에 있다. 그 사진은 이제 그의 스승 유작이 되었다. 그는 인물과 풍경 사진을 찍는다. 지난 12월에 마침 서울에 있을 때 그의 사진전 <BLUE>에 갔었다. 거기서 그가 하루에 우리나라 서쪽과 동쪽 바다를 오가며 찍은 사진을 보았다. 블루톤이 좋기도 했지만 사진에 남아있는 묘한 여운이 마음에 들어 작품으로 된 12장의 달력을 샀다. 달력 값이 당시 커트 1회 가격과 비슷했다. 그 달력은 내가 처음으로 독립한 집에 맨 처음 벽에 건 작품이었다. 빈 방에 그 달력 사진이 가득 차 허허로운 나를 위로해 주었다. 사진을 찍기 때문인지 그는 규격을 넘지 않는다. 파격도 과도함도 없다. 한때는 그런 점이 살짝 아쉬웠다. 그러나 그는 인물을 잘 파악했을 것이다. 내가 마음으로는 파격을 원해도 그걸 감당할 깜냥이 못 된다는 걸 그는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반삭을 해 달라고 하던 때에도 숏커트로 달래주었다.


다른 때보다 더욱 정성스러워 보이는 가위질이 끝나고 그의 현란한 드라이와 빗질로 세련되면서도 귀여운 머리가 완성되었다. 헤어스타일은 옷보다 더 중요한 패션이고 얼굴에 가장 가깝기 때문에 자기 만족도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날따라 너무 더워서 맨얼굴에 하필이면 대전 원도심레츠에서 왜가리가 사 주신 천 원짜리 원피스에 부암동 의상실 로브를 걸쳐 입고 낡은 가죽 샌들을 신고 마을버스와 지하철과 시내버스를 타고 청담동에 온 내 모습에서 머리만 돋보였다. 그 대가로 동네 미용실의 아홉 배나 되는 돈을 내고 왔다. 그래도 남들은 한두 달에 한 번씩 갈 미용실에 일 년에 한두 번밖에 안 간다는 변명을 하며 생애 최고의 사치를 부린다.

그건 그가 우리나라 최고의 헤어디자이너라서가 아니다. 언제나 한 장소에 믿고 찾아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인생에 든든한 위안이 되기 때문이다.



강남에서 머리를 하고 강북 지하철역 근처의 모르는 정형외과에 갔다. 반 년 전 무리하게 오른팔과 손을 쓴 후 어깨가 아프기 때문이었다. 최근 상태가 나쁘지 않았지만 너무 오래가는 것 같기에 서울에 올라온 김에 가보았다. 찍어 보나 마나 안 나올 게 뻔했지만, 절차에 따라 엑스레이를 찍었다. 자진해서 방사선을 맞아야 하니 찝찝했다. 그런데 촬영기사가 브라를 벗어야 한다고 했다.


“와이어 없어요?”

“네.”

“후크는 있죠?”

“없어요.”

“후크도 없어요?”


기사가 픽 웃었다. 중년 남자였다. 스포츠 브라니 입고 있던 옷 그대로 찍어도 상관없었다. 그런데 기사가 목걸이를 발견했다. 금줄에 다이아몬드 마다하고 걸고 다니는 빨간 비닐줄에 은목걸이 굴뚝새. 이 정원일기에서 나와 마찬가지로 주인공인 새. 어찌나 꽉 잠갔는지 풀기가 쉽지 않았다.

간신히 목걸이를 풀고 찍으려는데 기사가 기어이 찾아냈다는 듯 원피스 뒤 지퍼를 지적했다. 결국 병원 내 이 사람 저 사람이 다 입었을 티셔츠를 입고 엑스레이를 여러 장 찍었다. 결과는 예상대로 깨끗했다. 원인을 알 수 없으니 더 아플 때 오라는 젊은 의사는 오른쪽 눈에 울긋불긋 멍이 들어있었다. 패기가 넘치나 보다.

몇 년 만에 받아보는 물리치료는 새로웠다. 열 찜질 후 전기자극을 받고 침대를 옮겨 젊은 남자 물리치료사로부터 마사지를 받고 물침대에 누웠다 일어났다. 좋은 자극이 가해지니 팔도 낫는 듯했다.


다음 날 회의도 하고 병문안도 했다.

마스크 해제가 된 지 두 달이나 되었지만 서울에 갈 때는 마스크를 쓴다. 기차에서 두세 시간, 버스와 지하철에서 한 시간. 그 긴 거리에서 스치는 누군가가 바이러스 보유자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 내 강박적인 위생개념도 무장해제시키는 게 있다. 세상 일에는 예외가 있다. 그러니 특별법이란 게 있지 않은가.


서울에서 마지막 밤, 친구네 공사 대신 ‘살롱’에 참석했다. 친구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시력이 점점 더 나빠지고 있었다. 그 상태로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는 그의 정신력이 놀라울 수밖에 없다. 그날의 주제는 여러가지를 떠올리게 했는데 대화 내용보다 그의 리액션이 놀라웠다. 그는 소리로 추임새를 넣어 호스트에게 최선의 반응을 하고 있었다. 가끔 만나지만 언제나 그에게서 경이로운 건 독창적인 문장력과 위트다. 유머는 최고급의 언어다. 그런데 그 코드가 맞지 않을 때 서로 불편해진다. 그래서 유머 코드가 맞는 건 상당히 중요하다. 그러니 모두가 웃을 수 있는 유머를 할 줄 안다는 건 탁월한 수준이다. 그의 말에 참가자들이 웃었다.



와이어도 후크도 없는 브라를 실과 바늘로 꿰맸다. 걷기 시작할 때부터 5년 넘게 입었으니 버릴 만도 한데 터질 때마다 벌써 수차례 바느질을 한다. 멀쩡한 속옷이 없는 것도 아니니 궁상은 아니다. 내 몸에 잘 맞는 걸 버리고 싶지 않을 뿐이다. 박음질이라곤 하나도 없이 접착제로 만들어진 스포츠 브라에 스티치가 생겼다. 도저히 못 입을 정도로 찢어지지 않는 이상 계속 입을 생각이다. 숨 막히는 게 싫어 속옷을 사기가 쉽지 않다. 겨울철엔 노브라도 가능하지만 여름엔 좀 난감하다. 여름엔 여자뿐만 아니라 남자도 마찬가지다.


바느질을 다 한 후 다시 버스와 지하철에서 한 시간, 기차로 두세 시간 걸려 콩이네로 왔다. 제일 싼 기차를 타기 때문에 시간이 두 배나 걸린다. 예전엔 당연히 KTX를 타고 다녔다. 그러던 내가 이제는 무궁화호를 탄다. 탈 때마다 사람이 많아서 놀란다. 5~6천 원 더 주고 새마을호인 ITX를 타면 훨씬 쾌적하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하며 펑펑 쓰던 때는 지났다. 평생 처음인 월세도 낸다. 하지만 그래도 걱정은 없다.


집 앞에 분홍색 상사화가 피어있다. 봄에 먼저 나온 잎이 진 후 여름에 꽃이 피어 둘이 만나지 못해서 상사병에 걸린 꽃. 그러나 두 대가 나란히 피어있는 모습은 외롭지 않아 보였다. 꽃과 꽃이 사랑하면 되지 굳이 만나지 못하는 잎과 사랑할 필요가 있나. 지금 자신에게 없는 것에 연연해 말고 있는 것에 만족할 일이다.


다음 날 전화가 왔다. 친구가 날 못 알아봐서 미안했다고. 내가 속상할 일이지 그가 미안할 일은 아니다. 덕분에 오지랖이라고 망설이던 관계가 시작되었다. 이제는 새로운 인연이 부담스럽다. 현재 있는 인연에게 충실할 시간도 부족하다. 에너지를 확장하기보다는 응축 정제하고 싶다. 하지만 또 모른다. 선한 마음으로 이어진 인연이 또 어떤 좋은 일로 양상 될지.


늦은 오후지만 햇볕이 따가워 코펠에 물을 끓였다. 정원 수돗가에 있는 큰 고무 대야에 찬물에 넣고 뜨거운 물을 섞었다. 미지근한 물과 샴푸로 콩이를 목욕시켰다. 수건으로 닦아주고 남은 물기를 말리려 산책을 했는데 너무 더워서 금방 돌아왔다.


초저녁에 콩이 산책시킬 겸 자전거를 타려고 운동화를 꿰어신으며 내려갔다. 그런데 마지막 계단에서 콩이에게 인사를 하다가 발을 헛디뎌 엎어졌다. 손에 들고 있던 음식물 쓰레기가 바닥에 흩뿌려졌다. 무릎과 종아리가 까지고 손바닥도 찍혔다. 얼마 만에 넘어지는 건지 모른다. 콩이가 들이받아서 상처 난 입술이 곪아서 일주일 넘게 제대로 먹지도 못했는데 서울에서 리현이 사 준 약 바르고 다 나으려던 참에 이젠 다리를 다쳤다. 너무 아팠지만 기다리는 콩이를 생각하니 그냥 올라갈 수 없어 목줄을 잡고 살살 걸으며 산책을 시켜주었다. 조금 걸으니 팽팽하게 당기던 무릎이 덜 아팠다.


자전거를 탔다. 줄을 푼 콩이가 옆에서 쌩쌩 달린다. 시골에선 목줄을 풀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다. 하긴 만날 사람도 별로 없다. 그런데 어떤 부부가 다리 다친 개와 함께 산책하고 있었다. 전에도 한번 본 적 있던 그 개는 금륜이와 산동이와 같은 종이었다. 콩이가 나를 따라오지 않고 그 개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목줄이 없어서 그랬는지 산책 중 날 따라오지 않은 건 처음이었다. 콩이는 사람보다 개가 더 좋은가? 하긴 콩이는 사람이 아니라 개지. 하지만 그 개랑 같이 갈 순 없지 않은가. 게다가 그 개 주인은 콩이를 쫓았다.

자전거로 몇 번을 되돌아가니 한참 만에 콩이가 나를 따라 달렸다. 돌아오는 길, 살짝 내리막인지 페달을 밟지 않아도 쌔앵 달리는 자전거 옆에서 콩이가 헐떡헐떡 혀 빼물고 달린다. 전력 질주하는 튼튼한 콩이가 멋지다. 얼른 돌아가 물을 마시게 했다. 목욕하고 달리기도 하고 빗질도 한 콩이가 뽀얗다.


팔월이다. 기후위기로 점점 지독해지는 무더위도 말복 지나면 사라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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